사도행전 7:44-60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스데반의 설교(44-53절)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공회(법정)에서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행한 자기 변증의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 생각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인간과 함께하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심이시라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500-1000년 전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에서, 미디안에서,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의 순교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살이하다가 출애굽하여, 자유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장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특별한 장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을 장막의 크기, 형태, 재질을 모두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장막의 이름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비를 ‘증거판’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 증거판이 장막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 장막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로 ‘성막(聖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 주시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會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이 장막은 ‘성소’, ‘여호와의 장막’, ‘증거막’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 장막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이동성’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을 이동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둔 것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즉 언제나 사람이 있는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모세에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증거의 장막을 메고 들어갔습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약 48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배 장소였고,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46-47)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목동이었던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유다의 왕으로 등극했고, 사울왕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처소를 건축하고자 하였습니다. 작은 이동식 장막 대신에 거대한 건축물 성전 짓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며 흔쾌히 허락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짓기를 원했던 다윗에게 그의 집(가문)을 오히려 세워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대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증거의 장막을 짓도록 하실 때, 거대하게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장막의 크기는 동서 방향으로 100규빗, 남북방향으로는 50규빗이었습니다. 1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약 45.6cm이니, 장막은 동서방향으로 약 45.6m이고, 남북방향으로 약 22.8m이며, 그 넓이는 약 1,040㎡입니다. 이것을 평수로 말씀드리면 약 315평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장(家長)인 장정만 해도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부분 가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수많은 잡족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한 사람들은 최소한 200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집은 315평이었습니다. 그것도 마당까지 합친 넓이였습니다.
이 장막에는 아주 중요한 공간이 2개가 있는데, ‘성소’라고 불리는 성소 바깥 공간과 ‘지성소’라고 불리는 성소 안쪽 공간입니다. 이 두 공간의 가로세로 길이가 30규빗×10규빗으로, 약 62.4㎡, 약 18.9평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19평도 되지 않는 그 좁은 곳에서 거하시며 사람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때때로 삶이 고달프게 여겨지고, 인생이 팍팍하다고 생각되어도,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19평 속으로 오셨다는 것만 생각해도 용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나 솔로몬에게 큰 공간의 건축물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9평 공간에도 당신의 백성을 충분히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하신 것은, 다윗이 간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건축물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 성전 건축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그 성전 안에만 계시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48-50)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뒤,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 중 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이 지은 건축물 속에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유리잔 속에 담긴 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오대양, 바다와 같습니다. 아니 바다도 한계가 있기에 그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크십니다.
솔로몬도 그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전을 통해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고, 언제나 동행하시는 하나님임을 늘 확인하도록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건물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7년 동안 지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공된 성전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또 그 가슴은 얼마나 벅차올랐겠습니까? “이 훌륭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겠다”라고 결심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그 완공된 성전을 보았을 때는 그들의 영혼이 고양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과 결심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에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그 성전 안에 가두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히셨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착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신다고 생각했기에 자신들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은 단지 절기를 지키거나 종교 행위를 할 때만 만나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성전 안에만 계신 분으로 여긴 결과가 이러하였습니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결론입니다.
(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목이 곧다’는 ‘목이 뻣뻣하다’는 의미인데, ‘완고하고 고집이 세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만하다기보다는, 욕심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만 행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기에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버리고서도, 자신들은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54-60절)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마음에 찔렸고, 이를 갈았습니다.
‘찔리다’는 가책을 받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톱으로 잘라 조각 조각을 내다’입니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정도로 격분했다는 뜻입니다. 또 ‘이를 갈다’는 극한 감정과 분노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설교를 끝낸 것은 설교가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극도의 분노를 표현하여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57-58)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람들은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스데반의 설교가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스데반의 설교를 듣지 않겠다는 행동으로 귀까지 막아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지 않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낸 뒤, 죽을 때까지 돌을 던졌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사형판결권과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데반을 공개처형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죽일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들이 성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유대인들이 분노하여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으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치는 것이 스데반에게는 몹시 두려운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던 반면에, 스데반은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전한 설교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언제나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설교에는 이스라엘의 1,0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1권으로 된 구약성경이 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서 고구려 건국부터 고려 건국까지, 또는 고려 건국부터 지까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가진 성전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해박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올바른 말씀을 전하고 사도행전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 주님의 팔로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과 함께 성전 된 삶을 살며, 주님을 중심으로 따르는 길을 걷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스데반의 구약 시대에 대한 이해, 특히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시고,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 또렷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는 통찰력은 참 놀랍습니다.
또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길 정도로 분노하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는 두렵고, 극한 상황에서도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주목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은 부럽기도 합니다. 그의 죽음이 당시에는 안타깝게 여겨졌을지라도, 그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한 믿음의 사표가 되었고,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거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고, 우리가 성전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증거의 장막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였습니까?
2.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제한한(특정한 곳에 가둔)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3.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분노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성과 감정을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감정이 격해질 때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4. 늘 성령 충만하여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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