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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10:24-48

사도행전 10:24-48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지난 말씀에 이어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고넬료 사건이 이어집니다. 고넬료 사건은 10장과 11장에 연속하여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반복하여 기록된 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이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고넬료 사건에 대해서, 베드로는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라고 말합니다. 즉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과 모든 민족을 구원하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큰 주제는 이사야 49:6의 말씀인,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우리민족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으로 가다(24-29)

(24-26)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청함을 받고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갈 때 혼자 가지 아니하고 욥바에서 온 형제들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갔음을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이 증인이 있는 공적인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로 온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인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14을 보면, 베드로를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고넬료는 기대와 떨림으로 베드로가 오기를 온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기다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집으로 들어갔을 때, 고넬료는 베드로를 맞이하고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고넬료가 어떤 심정으로 베드로를 맞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바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청지기의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간 베드로는 ‘복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을 놓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는 자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밝혔습니다.

(27-29)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유대인의 전통에 따를 때,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전통으로는 이방인과 교제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고 있는데, 그들의 전통은 그 부정한 것에 접촉되지 않기 위해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이방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같은 일반 유대인들도 지키고 있는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온 것은 순전히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아직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왜 이곳으로 보내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왜 자기를 불렀는지 물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와 구원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 하다(30-33)

(30-31)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 것의 의미는 당시 부분적으로 유대교로 전향한 개종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완전히 개종하여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유일신을 예배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유일신을 믿고, 율법의 윤리를 지켰지만, 의식적인 율법 즉 할례나 정결례나 제사와 같은 것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이 율법의 의식적인 부분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으로서 율법에서 정한 정결한 음식만 먹고 다른 이방인들과 교제를 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율법의 의식적인 부분은 지키지 않았지만, 율법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라는 말에서도 그것이 드러납니다.

또한 고넬료가 제구시에 기도를 했다는 것은 더욱이 그가 이스라엘의 유일신을 믿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구시는 성전에서 저녁 희생제사와 특별기도 예식이 있었던 시간으로, 고넬료가 성전의 기도 일정에 따라 기도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어떻게 보면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의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어 외식자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유대인다웠습니다. 고넬료는 할례와 의식적인 율법만 지키지 않았을 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 중에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이제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이 내리시다 (34-48)

(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베드로는 자신이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곳에 자신을 보내셨는지 알고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인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36-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먼저 예수가 만유의 주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와 연설이 5번 정도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도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만유는 헬라어로 ‘파스’로 모든 것을 의미하고, 이 문맥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는 것을 가감 없이 전하였습니다.

(44-45)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듣는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들림으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갔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짐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아직 율법의 전통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부어지며 그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였습니다. 특히 방언으로 예언을 하는 모습은, 요엘 선지자가 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그 예언이 성취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욜2:28).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신 것 입니다(사49:6).

사실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복음은 들풀처럼 번져서 1900년 후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의 모습이 고넬료의 이 사건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1873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쇄국정책으로 국경이 폐쇄된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의 국경인 고려문에서 한글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번역을 위해 포섭한 조선사람들 중 김청송은 스스로 복음서를 자세히 읽으며 1883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청송은 번역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길림성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 보급했고, 이를 통해 몇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존 로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존 로스가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자, 성경을 읽고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더 많아져 1884년에 존 로스를 직접 찾아왔습니다. 존 로스는 그때 직접 집안현으로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존 로스는 선교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생각하면 기특하기 짝이 없다. 한 사람의 선교사도 찾아간 일이 없는 그곳에, 다만 한글 성서와 전도문서가 들어간 그곳에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들은 2년 전까지 이교의 암흑 속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기쁨에 찬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고려문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서상륜이 성경을 국내에 반입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인 항해도 장연군 송천에서 1883년에 18명의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1884년에는 서울을 오가며 성경을 뿌려서 79명으로 늘어나, 중국에 있는 존로스 선교사에게 서울와서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로스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오기 전에, 조선에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믿은 100명이상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도 600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도 없으며 성전도 희생제사도 없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과 이교를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넬료와 같이 구원받을 만한 율법의 자격이나 조건을 가지지 못한, 이방 민족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로 막혀 있던 율법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엡2:14-15). 그리고 사망의 그늘에 있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베푸셔서, 자기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와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허문 장벽을 다시 세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장벽을 세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몸에 할례를 행하고, 정결한 옷을 입고, 정결한 음식을 먹으며 그런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장벽을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우리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이방인임을 기억하십시다. 그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속하셔서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일 말씀에서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장벽을 치며, 자신들은 삭개오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 삼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장벽도 허물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도 허물었듯이 우리도 복음으로 우리가 만든 장벽을 허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조건 없이 베풀어진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저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구속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스스로는 복음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마음의 문을 열어 믿음을 부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허무신, 그 율법의 담을 우리가 다시 쌓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회개합니다. 주님, 저희를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의 은혜로 주신 평화를 회복하고 누리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베드로와 같이 유대인들은 왜 이방인들과 사귀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고, 우리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여기는 부분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2. 고넬료는 율법의 의식적인 부분은 지키지 않았지만 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생각해보고,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할지 묵상해 봅시다.

3. 베드로가 깨달은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환상의 뜻을 깨닫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차이점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4.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였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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