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9-30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진 성읍에 정착하며 복음의 씨앗들을 곳곳에 뿌렸습니다.
환난으로 인한 복음전파 (19-21절)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흩어진 유대인 성도들은 복음의 메시지가 이방인들을 위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북쪽으로 4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안디옥은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인구 오십만명이 살고 있는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아름다운 곳에 있었고 오론테스 강가에 있어서 물 공급도 풍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은 끔찍할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으며, 이교도들 가운데 성행하던 악한 풍조들과 성적 부도덕을 부추기는 여러 가지 이교적 제사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디옥은 복음의 중심지로 변화하게 됩니다.
(20-21)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구브로는 안디옥에서 떨어진 지중해의 섬이며,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들은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환난으로 인해’ 오히려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선교의 중심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 때문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이방인 전도에 대한 새로운 열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안디옥이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몇 사람에 불과한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직접 보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구원받지 못하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속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누구에게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을 것 같고 구원 받으면 안될 것 같은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역사는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나눈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좋은 것을 알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것처럼 성도는 어떤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 (22-26절)
(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의 부흥에 관한 놀라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믿음 충만한 사람입니다. 구브로 출신이던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전도자들과 자연스러운 민족적 유대감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바나바는 관대한 사람이었으며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궁핍했을 때 헌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나바는 다른 모든 이들이 다소의 사울을 두려워하고 사울의 회심을 의심할 때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보고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만 의지할 것을 권면합니다.
(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돕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안디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하고 교회 사역이 증가하면서 바나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소에서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안디옥 교회를 더욱 부흥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건강하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듣게 됩니다. 즉 유대교와 구별이 되는 그룹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주께 돌아온 많은 이방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는 나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말씀의 젖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그동안 세상을 통해 잘못 길들여진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지 하나씩 배워 나가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세상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유대 교회를 함께 돕는 안디옥 교회 (27-30절)
(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온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 입니다. 아가보는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큰 흉년이 온다고 성령으로 예언을 합니다. 아가보는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주후 41-54년,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발생했습니다. 이 말씀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지원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29-30)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은 유대에 있는 교회를 형제로 여기며 그들을 돕기 위해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도왔습니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안디옥 지교회는 예루살렘의 모교회를 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은 평소 유대인들과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인데,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돕고자 힘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무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한 아버지를 모신 자로서 서로가 형제로 여기고, 한 몸이기에 서로를 지체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를 참 불편하게 하고 원수와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그냥 모른척하고 싶을 때는 없습니까? 예수님의 희생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섬김을 기억하며 우리들도 누군가를 그렇게 힘이 닿는대로 돕는자가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은혜로 살아가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 하겠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한 핍박과 환난이 커졌고 그들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주 심각한 큰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897년 이탈리아 사회학자 파레토(Pareto)가 우연히 일개미들을 관찰하다가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약 20%뿐이고, 나머지 80%는 그럭저럭 시간만 때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 잘하는 20%만 따로 갈라놓아 보았는데, 이들이 처음에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 같더니 곧 그중에 80%는 놀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집단이든지 20%가 80%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지난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 다수로 일했던 적이 없었고, 언제나 소수였지만 그들이 시대를 바꾸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금의 한국교회는 참으로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20%의 헌신자들이 세워지면 어디서든 영적인 분위기를 바꾸고 또다른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채우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화평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야만 합니다. 20%의 헌신자들이 되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진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심을 감사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로 인해 우리들도 구원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참 버겁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영적인 말씀과 물질적인 것들을 채워줄 수 있는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참 힘들고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요즘에도 우리들이 소수의 헌신자들이 되어 믿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은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을 채우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나의 힘이신 여호와’만을 끝까지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박해를 받아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우리들은 삶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핍박을 받을 때는 없습니까?
2. 우리들이 주변에서 전도해야 하는 사람들을 지금 생각해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3. 흉년을 당해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기꺼이 도왔던 안디옥교회 성도들처럼 지금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지 생각해보고 작은 사랑을 실천합시다.
4. 박해를 받아 흩어진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들도 그 소수의 사람들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오늘부터 무엇을 결단하고 실천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가정, 직장, 교회, 인간관계 등).
'새벽기도 > 사도행전(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3:1-12 (0) | 2022.09.15 |
---|---|
사도행전 12:1-25 (0) | 2022.09.15 |
사도행전 11:1-18 (0) | 2022.09.15 |
사도행전 10:24-48 (0) | 2022.09.15 |
사도행전 10:1-23 (0) | 202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