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1-23
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증거합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 및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것처럼 생명을 얻는 회개(11:18), 즉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 사역의 실제적인 포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즉,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 한 사람의 회심 사건이라는 의미를 넘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1:8)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가 종교적 관습으로 인해 이방인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담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가진 이방인을 향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섬세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도적인 역사하심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1~8절)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는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에서 북으로 약 53km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를 위해 건축한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으며, 이곳은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고, 로마 소속의 군대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1절이 고넬료의 사회적 배경을 증거하고 있다면, 2절은 고넬료의 신앙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백부장이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 나아가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적인 신앙이,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외적인 표현으로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배치된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인들을 향한 다양한 횡포가 만연하였던 때에, 오히려 유대인들을 향해 구제한다는 것과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행동과 결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료 백부장들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고넬료를 비난했을 것이며,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에게는 로마 군대 장교가 베푸는 선행의 의도를 의심하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넬료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를 기억하셨습니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를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는 고넬료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상달되다(올라가다)'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 제물의 연기가 하늘 방향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로 이루어진 삶의 예배를 분향단의 연기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음을 증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억'이란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마가복음 14장 9절에도 등장합니다.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인의 행동에 향유를 허비하였다며 화를 내며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인이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로 주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으며,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인의 행위도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과 의심의 대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주님 앞에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을 뿐더러 기억하신 바가 되었습니다. 천사를 통해 이 사실을 들은 고넬료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삶을 온전히 받으시며 기억하신다는 소식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고넬료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갈등과 고민, 수고와 눈물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고, 고넬료에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받은 은혜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일에 물꼬를 틀게 되는 은혜의 통로로써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회적 지위, 즉 삶의 자리는 모두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 각자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사회적 지위인 백부장을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구제와 기도의 삶을 기억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의 관심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주를 경외하며 선을 행하는 삶의 예배를 온전히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깨끗하게 하신 것(9~16절)
고넬료는 천사의 명령에 따라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하인 두 명과 경건한 부하 한 명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하기 직전에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는 내용을 9절에서 16절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11-13)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네 귀퉁이에 매어 내려온 그릇 안의 각종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 안에는 레위기(레 11:1-47)와 신명기(신 14:3-20)에 열거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 구별 없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짐승에 관한 이러한 구분이 더이상 의미가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제 모든 짐승이 다 정결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모든 짐승을 섞어 놓으시고,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그러나 베드로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14-15)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구약에서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의 구별은 하나님의 정결한 백성 이스라엘과 부정한 이방인을 구분하는 중요한 규정임에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철폐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나병환자를 만지셨으며, 부정한 죄인인 세리와 창녀들과 식탁 교제하셨고, 유대인들의 정결법을 준수하지 않는 일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시사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이상 정결한 이스라엘과 부정한 이방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결한 백성과 부정한 이방인이라는 구분은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철폐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엡 2:14-16, 새번역)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원수 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무시고 한 몸 이루게 하셨다면, 이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지 않을 이유와 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막힌 담으로 말미암아 원수 된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이 편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지 못한 채,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거부하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지 못할 담, 소멸하지 못할 원수 된 것은 결코 없습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 안에 사랑의 대상이 확장되고, 원수 맺은 담이 무너져 온전한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침(17-23절)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라 말씀하셨으며, 고넬료의 사람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정결케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의아해 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의 원뜻은 '심히 당황하다'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하나님 명령을 거절한 것, 그리고 '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신 내용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알 길이 없어 심히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시몬의 집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부릅니다. '마침'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두'인데, 원 의미는 '보라!, 자!'와 같이 독자나 듣는 사람에게 집중할 것을 요청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살려 17절을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이 대체 무슨 뜻인가 하여 심히 당황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보십시요, 마침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의 목적이 이 순간을 위함이었음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방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알게 된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9-20)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때마침 찾아온 이방인들과 성령께서 그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통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백부장 고넬료에 대해 들었으며, 그들과 함께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고넬료를 만나기 위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도적인 역사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고넬료는 결코 무두장이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며, 베드로를 만났다 할지라도 베드로 앞에 결코 복음에 귀 기울일 겸손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지 않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결코 이방인들을 따라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러 떠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도적인 역사하심 안에 고넬료를 준비시키시고, 베드로의 한계의 담을 허무심으로 땅 끝까지 생명의 복음이 흘러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편견과 갈등의 담, 원수 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무시고 만나게 하심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삼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드림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오묘한 손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원수 된 것을 허무시고 정결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화평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막혔던 관계의 담이 주님 안에서 허물어져, 하나 되는 역사가 오늘도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매순간마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순종하여 영원한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비록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주여, 결코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외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아집, 편견을 십자가 은혜 안에서 내려놓는 겸손함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뻐 받으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떠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지 묵상해 보세요.
2. 하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셨는지 묵상해 보세요.
3. ‘마침’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4.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주님 앞에 허물어야 할 관계의 담이 있는지 묵상해 보세요.
'새벽기도 > 사도행전(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1:1-18 (0) | 2022.09.15 |
---|---|
사도행전 10:24-48 (0) | 2022.09.15 |
사도행전 9:32-43 (0) | 2022.09.15 |
사도행전 9:19b-31 (0) | 2022.09.15 |
사도행전 9:1 – 19a (0) | 202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