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16-40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바울은 성령의 강권과 환상을 통해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체 없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입성했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 성에서 루디라를 만났을 때만해도 그들의 사역은 순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굽힌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대하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리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종국에 가서 구원의 복음이 은혜롭게 전해지는 그 결과는 이전과 동일했지만, 그 과정은 더없이 고되고 눈물겹습니다.
감옥에 갇히게 된 과정(16-24)
(16-18)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눈물겨운 사건의 과정의 발단이 되는 사건입니다.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으로 가던 중에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따라 붙었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며 고함쳤습니다. 활자로만 보면 매우 유익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느낀 것으로 보아,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사역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외침은 빌립보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 일행을 경계하도록 하여, 도리어 복음의 전파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바울은 지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이 쫓겨 나가는 사건에 이어질 자연스런 반응은, 귀신까지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19-21)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귀신이 쫓겨 나간 여종의 주인들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낸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자유를 얻은 한 영혼(생명)이 아닌, 큰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의 상실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바울이 그저 자신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수단을 빼앗아간 나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곧장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장터’로 번역 된 원어의 원형은 ἀγορά아고라 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집회가 열리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남자들과 어른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로서 성읍의 중요한 재판이나 회의가 열리는 그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관리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고발의 내용을 경제적 손실이 아닌, 로마법에 반하는 풍속을 전파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임을 앞서 밝힘을 통해, 관리들의 판단에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22-24)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몰려있던 무리는 즉각 반응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로마의 법에 반하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내용을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식민지의 기득권을 유지함에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상관(치안관-새번역)들은 곧장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다스릴 것을 명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온 몸에 몸둥이찜질을 당한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손에 이끌려 빛도 들지 않는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발에는 차꼬가 채워진 상태였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때리고 옥에 가두던 입장에 있었던 바울이었으나, 오늘은 그 반대 입장이 되어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신세였습니다. 바울은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아시아가 아닌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이었습니다. 분노하며, 원망을 토한다 해도 누구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남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유(25-40)
(25-26)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만신창이가 된 몸을 누인 곳은 밤인지 낮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냉기 가득한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빌립보의 감옥은 이처럼 그들의 육체는 가둘 수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결코 가둘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기도와 찬송은 신비한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갑작스런 큰 지진으로 인해 옥터가 흔들리고 모든 옥문이 열렸습니다. 만약 신비한 현상이 여기까지였다면, 이를 두고는 자연재해로 인한 현상이라 결론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발에 채워진 차꼬를 포함해 감옥안의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삽시간에 다 풀어졌습니다. 이 현상은 그 어떠한 자연재해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울과 실라를 포함한 오늘 우리에게는 기쁨의 순간이지만, 이와 반대로 큰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로마법은 간수가 죄수를 놓쳤을 경우에는 그 책임을 간수에게 물었습니다. 간수는 죄수가 받던 벌을 고스란히 대신 짊어져야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든든히 지키라는 상관의 명을 받았음에도 잠들었던 간수는 벌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간수는 지체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간수의 귓가에 깊은 어둠 속에서 나는 큰소리를 들었습니다.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바울은 자신과 실라가 여전히 감옥 속에 있음을 밝히며, 칼을 빼든 간수의 손을 멈춰 세웠습니다. 옥문이 열렸음에도 그들이 도망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 이어질 결과를 통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간수는 칼이 아닌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실라를 옥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간수는 범상치 않은 그들을 향해 선생이라 높여 부르며, 구원의 방법을 물었습니다(29-30). 지체 없이 분명한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진리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담고 있는 이 한마디는 큰 힘이 있었습니다. 곧장 이 말씀은 간수와 그의 가정 안에서 역동했습니다.
(32-34)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간수는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고,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 가족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의 온 집안은 하나님을 믿고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몸을 씻고 음식을 먹고 난 후, 아침이 되기 전에 감옥으로 돌아갔습니다. 날이 밝자 상관들에 무슨 일이 이었던 것인지, 바울과 실라를 풀어 주고자 했습니다(35-36).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출소 문제가 음성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거절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37-40)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후로 이어질 빌립보에서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빌립보의 관리들은 감옥으로 직접 찾아와서는 그들은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성을 떠나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는 곧장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위로하고는 마게도냐의 다른 지역을 향해 전도여행을 이어갔습니다.
바울이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뜻에 따른 결과는 심한 몽둥이찜질에 이어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감옥에 갇힌 바울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도와 찬양하며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에 이어 감옥 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신세였던 바울과 실라를 통해, 간수였던 사람과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이 기도하며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의 상황과 환경을 끝(결과)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경험한 감옥 사건은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구원의 통로로서 쓰임 받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하루하루를 결과가 아닌 과정임을 기억하며 신앙의 터닝 포인트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삶에서 경험 될 것이고, 우리 삶은 구원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
힘이신 하나님.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당한 바울과 실라의 고난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역시 하나님이 역사를 체험하고 구원의 통로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결과를 넘어 과정으로 받아들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루하루를 신앙의 터닝 포인트로 삼아,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개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됨을 깨달았을 때, 어떠한 반응이 나타납니까 ?
2. 생명을 살리는 것과 수익이 나지 않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3. 자신이 감옥에 갇힌 바울이었다면, 자결하려는 간수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과정이었던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5. 코로나 시대는, 훗날 우리에게 어떤 과정으로 기억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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