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22-41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22-35절)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공의회(회의) 장’라고 불립니다. 그 공의회의 주제는 ‘주님을 영접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할례 문제’였습니다. 그 공의회의 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 그리스인들에게 더이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범죄행위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일을 삼갈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더이상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들이 혐오하는 일을 삼갈 것을 촉구한 것은 불필요하게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의 최종판결 이후에 있었던 후속 조치에 관해 전해 줍니다.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는 예루살렘 공의회(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공의회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이 난 후에는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어떻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입증하는 베드로와 바울 및 바나바의 증언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으로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유다와 실라를 통해서 야고보의 최종판결의 내용을 편지로 직접 들고 가서 전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이방지역에서 야고보의 최종판결에 대한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예루살렘 교회(초대교회의 모교회)가 작성한 편지의 수신자는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였습니다. 수리아는 다메섹 북쪽,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인데, 수리아 지역의 행정수도가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리고 길리기아는 지금의 터키 동남쪽에 위치한 지역이었습니다. 길리기아 지역의 행정수도가 다소, 바울의 고향이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가 처음으로 촉발된 곳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할례에 대한 공의회의 최종판결 내용을 담은 편지의 수신자는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안디옥을 넘어 수리아와 길리기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촉발된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할례 문제가 안디옥을 넘어 여러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안디옥 교회는 평온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거짓 가르침을 퍼트려,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이 마음이 혼란하도록 휘저었습니다. ‘마음이 혼란하게 하다’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영혼을 뒤흔들다’, ‘영혼을 약탈하다’입니다. 멀쩡하게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것과 같고, 그 영혼을 약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켜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들로부터 이런 호칭을 듣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은 일인데, 또 바나바와 바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불렀다는 것은 바나바와 바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끼지 아니하다_파라디도미(paradidōmi)’는 ‘넘겨주다’의 뜻과 함께 ‘내버리다’, ‘포기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과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생명마저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 참수형으로 마침표의 점을 찍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원한 생명의 이음줄로 지금까지 연결해 주셔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27-29)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이 혐오하는 것-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삼갈 것을 촉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짐’을, 다시 말해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성령과 우리’입니다. 그와 같은 결정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혹 나와 불협화음 속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쪽이 모두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 있으면 아름다운 화음을 낼 수 있습니다.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그들’이란 안디옥 교회의 공동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와 실라입니다. 그들은 함께 안디옥으로 내려가 교인들에게 사도들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위로한 말’ 앞에 숫자 1이 붙어 있어 아래쪽 주란 1번을 보면 ‘또는 권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결내용을 ‘위로한 말’, ‘권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판결내용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런 회의 결과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할례의 복음이 아니라 세례의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서 돌에 맞아 죽음까지 갔던 일을 겪으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까지는 약 500km나 됩니다. 왕복이면 1,000km나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거기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는 할례의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또 베드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평소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집을 찾아가 그곳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이방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할례의 복음’이 아니라 ‘세례의 복음’이라는 기쁨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배려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의 결과임을 잘 새겨야 합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수고와 헌신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32-35)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 공의회 판결내용을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난 후에도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믿음을 굳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한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라섬(36-41절)
36절에서부터 18:22까지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2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1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가 다시 방문해서 사람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 때는 물론, 그동안 좋은 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에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이 마가라 하는 요한에 대해서 골로새서 4:10은 ‘바나바의 생질_누이의 아들’, 즉 ‘조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질_아넵시오스(anepsios)’는 ‘사촌’이 더 적절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 공동번역성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사촌_cousin’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사촌 동생인 이 마가라하는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청년이었습니다.
(38-39a)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울은 마가를 대동하자는 바나바의 제안에 반대하는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 초기에 밤빌리아 지방 버가에서 마가가 전도 팀을 무단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를 데려가자는 바나바의 의견과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는 바울의 의견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만 그었습니다.
그런데, ‘심히 다투다_파록쉬스모스(paroxusmos)’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2번 나옵니다. 본문과 히 10: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라고 번역한 것은 ‘서로 격려하며 피차 갈라서니’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39b-41)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마가를 대동하는 문제로 의견이 엇갈린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결별한 뒤, 먼저 바나바가 자신의 사촌 동생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본래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려 했던 취지가 1차 전도 여행지를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이자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였던 구브로 섬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행선지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함께 남서쪽으로 향한 바나바와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올라가며, 수리아 지방과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견고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할례의 복음’이 아니라 ‘세례의 복음’을 이미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더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최종판결을 내림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두고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촌 동생 마가와 함께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났습니다. 그들이 나누어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전도팀을 두 개의 전도팀으로 만드셨습니다. 마가도 후에 바울과 베드로 사이를 오가며, 주님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 중에 첫 번째 책이라고 여겨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기는 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는 베드로, 바울, 바나바를 비롯한 여러 주님의 사람들이 이방지역에서 수고하고 헌신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이 올바른 것을 결정하고, 행하는데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1차 전도여행에 함께 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인해서 2차 전도여행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바울은 실라와 함께 서로 다른 길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사역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전도팀을 두 개의 전도팀으로 만드셨던 것도 확인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적삼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 있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오히려 주님을 더 바르게 또 더 깊이 알아가는 통로가 됨을 확인하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한 것을 안디옥 교회와 이방지역에 알리는데,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때 얻은 유익은 무엇입니까?
2.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안디옥으로 전하는 일에 선택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까지 아니하는 자’라고 합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바알과 바나바는 마가로 인해서 2차 전도여행을 함께 떠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두 팀을 모두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이처럼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4.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소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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