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 1-15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1~9)
(1a)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리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빌립보에서 악덕 유대 고용주들의 모함으로 심한 매질을 받고 실라와 함께 옥에 투옥되었다가 다음 날 풀려났습니다. 빌립보 상관은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면서 바로 빌립보를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매질로 인해 상한 몸을 제대로 추스를 겨를도 없이 루디아의 집에 가서 고별인사를 하고 누가를 남겨두고 곧 바로 데살로니가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그는 심한 매질로 인해 만신창이(滿身瘡痍)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중에 바울이 치료를 받았다거나 잠시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도 빌립보에서 160km 거리에 있는 데살로니가까지 쉬지 않고 한걸음에 간 것 같은 뉘앙스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일행이 들렸던 ‘아볼로니아‘에는 “바울 강단(헬라어 배마 또는 비마)”이라 불리는 작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7:1절‘ 말씀이 새겨져있습니다. 바울이 그 바위 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생긴 유적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로가로 가면서 잠시 들렸던 마을에서도 성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당시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마게도냐 지방의 행정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 일행의 행보를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1b~2) ‘...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았던 것과는 달리, 데살로니가에는 행정 수도답게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고, 유대인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전도여행을 하면서 들른 도시에 유대인 회당이 있으면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해서 그 회당을 그 도시를 위한 전도의 거점으로 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유대인은 물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세 안식일동안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입니다.
추석 연휴 첫날인 9월30일에 94세의 국내 최고령 여의사이신 한원주 원장이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산부인과와 내과 전문의인 그녀는 1979년에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 원장으로 취임해서, 29년간 영세민과 노숙인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돌봤습니다. 83세인 2008년에 의료선교의원에서 은퇴한 그녀는 남양주시의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의 내과 과장을 맡아 올해 9월7일까지 12년간 환자 치료를 위해 전념했습니다. 그녀는 “사랑, 관심, 배려만으로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며 환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했고, 하루 평균 20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평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동안 기쁘게 살며 내 할 일을 할 겁니다."라고 하시면서, "할 수 있는 때까지 일하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 갑니다'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삼 주간에 걸쳐 구약성경을 토대로 강론한 내용에 대해 3절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즉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구약성경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들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사셔야만 함을 말씀한 다음,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빌립보에서 당한 고초와 160km에 달하는 긴 여정으로 인해 바울의 행색은 참으로 남루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키도 작고, 몸집도 작고, 또 다리는 안짱다리이고, 양쪽 눈썹이 일자 눈썹이고, 코는 매부리코이고, 이마도 대머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행색도 외모도 보잘 것 없는 그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한 유대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자,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속국인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도시였던 만큼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 신들을 숭배했고, 성적인 부도덕이 만연했던 도시였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우상숭배가 만연한 대도시에서 초라하고 볼품없이 작은 한 유대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놀랍게도 회당에 있는 이방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변화된 이유를 데살로니가 전서 1장5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살전 1:5a)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은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었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말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후 아덴에서의 바울 사역에서 살펴보겠지만, 당시에는 대중을 설득하는 수사학(修辭學)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언변으로 보자면 바울은 어눌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는 말은 ‘바울과 실라의 삶에 합류했다’는 의미입니다. 목사의 삶이 설교의 주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실라가 단순히 말로만 복음을 전도했다면 공중에서 흩어지는 공허한 말이 되었겠지만, 이들이 말로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만민제사장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회당에는 유대인도 있었는데, 본문은 복음을 받아들인 대상을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이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God-fearers-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말하는데,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되며, 또 유대사회에 속하지는 않되 유일신 창조주를 믿으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회심한 이방인들과 귀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는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회당에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회당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한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시기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골고다 십자가로 내몬 장본인은 유대 백성들이 아니라,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행위에 대해 시비를 걸어보았지만 번번이 자신들이 틀렸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자신들의 권위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다는 판단 하에 예수님을 시기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누명을 씌워, 반역 죄인으로 몰아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외지에서 온 바울이 자신들의 입지를 훼손시킨다는 피해의식에 휩싸여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을 잡으려고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이 묵고 있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7)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야손의 집에 바울이 없자, 그들은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 앞으로 끌고 가서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수를 임금으로 섬기는 반역죄에 동조했다’고 거짓 모함했습니다. ‘그러나 시청 관원들은 야손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습니다’ (새번역, 9) 일반적으로 피고인이 도망가거나 증거 인멸의 염려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원은 피고인에게 일정 금액의 보석금을 받고 보석을 허가합니다. 시청 관원들이 야손과 그 일행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다는 말은 야손이 반역 죄인인 바울과 다시 상종하지 않거나, 바울이 나타나면 즉시 바울을 신고하겠다는 조건부 석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야손과 그 형제들은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울을 몰래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10a)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
이들이 만나서 교제한 기간은 불과 3주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이들은 자칫하면 불이익을 당할 위험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과 역경이 도사린다 할지라도 거짓에 굴하지 않고 진리와 생명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다(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의 폭도들을 피해 한밤중에 피신한 바울 일행은 80km 거리에 있는 베뢰아에 도착했습니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곧바로 유대인 회당을 찾아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너그럽다’는 의미는 ‘관대하다’는 뜻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수용하는 고상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관대하고 너그러운 신앙인들이 될 때만, 나와 다른 성격과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복음의 통로자가 될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베뢰아 사람들이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울이 전한 말씀이 사실인지 알기 위해서 구약 성경을 상세하게 연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전한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만으로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은 성장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가르치는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 구역장입니다. 구역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역원들보다 한번이라도 더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됩니다. 한번 두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전보다 신앙이 성장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는 반드시 교회에서 인정한 기관이나 교역자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논리에 현혹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는 그들의 교활한 술책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베뢰아 사역 소식을 전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무리를 지어 베뢰아로 내려와서 소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곧 바다로, 즉 항구로 피신시킨 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아가야의 아덴까지 동행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유럽대륙으로 건너온 바울의 초기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럽 대륙으로 건너온 그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복음의 열매가 맺는가 하면, 바로 목숨이 경각에 처하는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상한 몸을 이끌고도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통로자로 전념했습니다. 그런 그를 통해 헬라의 우상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이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역경은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해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터닝 포인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고 한원주 원장의 경우,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30년간 함께 한 남편이 떠나고 나자 돈 모으는 것도 물질도 명예도 별 거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리학 박사로 명성을 떨친 남편에, 공부 잘하는 자녀들, 그리고 소문난 명의로 부러울 것 없었던 시절이 한 순간에 낙엽처럼 스러졌다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다시 서게 되더라고요. 사실 모태신앙이었지만 정신없이 가족들 돌보며 살아왔죠.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느라 의술이라는, 제가 받은 은혜와 은사를 소멸시키며 살아왔던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기도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바쁠 땐 주일도 빠질 때가 많았죠. 그런데 남편이 죽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저 하나님께 매달리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애원하다시피, 하나님께 상담을 하는 그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뭘 그렇게 울고불고 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육신의 상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복음 전도에 전념했던 2000년 전 사도 바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매일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본 94세의 한원주 원장, 이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전심을 다해 매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 한원주 원장은 <빛과 소금> 2019년 5월호 인터뷰 기사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신앙생활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돕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에 코로나 19라는 신앙의 터닝 포인트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는 곳마다 음해와 모함과 시기로 인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주님을 원망하거나 사역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 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각자에게 허락하신 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깊이 상고하여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잘 접목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유대인들과 같이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아니라,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신앙인으로서 나와 다른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기꺼이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도착한 도시에서 제일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구약성경을 풀어 설명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데살로니가 유대인 회당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4.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베뢰아 성도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5. 오늘 본문 중 어떤 말씀 또는 어떤 사건이 오늘을 맞이하는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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