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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19:1-20

사도행전 19:1-20
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오늘 본문은 바울의 3차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쪽의 로마령에 속한 중요한 도시입니다. 큰 상업 지구로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지만,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주요 부분에는 극장, 목욕탕, 도서관, 광장, 포장도로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데미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큰 헬라에서 가장 큰 건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약 3년 동안 강론하였습니다. 본문은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도시 에베소에서 바울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강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중 에베소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복음의 전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다(1-7)

(1-3)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에베소에서 가르쳤던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이르러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만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아볼로와 관계되어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 제자들도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요한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예수님의 세례와 구분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물로 베푸는 세례하고 하였고, 예수님의 세례를 불과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라고 하였습니다(마3:11).

예수님도 요한의 세례를 자신이 하는 세례와 구분하셨는데, 예수님은 율법은 요한 때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눅16:16). 이렇게 예수님은 요한을 율법에 속해 있다고 하시며, 복음과 구분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로마서(롬7:7)에서 말씀하시듯이, 요한도 자신의 세례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며, 율법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했습니다(눅3:3). 율법에 대해서 정의할 때, 율법은 모세오경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포괄합니다(롬3:20). 그리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창조질서이고,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윤리, 도덕, 양심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윤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옷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 주라’ 하고, ‘세리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은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세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윤리와 율법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속한 요한의 세례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는 하지만, 성령이 오시진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사모하고 그 율법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평가 절하해서도 안 되고, 평가 절상해서도 안 됩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며, 의를 의로 여기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창조질서에 어긋나게 되기도 합니다. 율법이 있을 때 죄를 알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구분하고, 율법이 있어야 할 자리와 복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구분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우리가 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로 우리를 백성이 되게 하셨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율법과 복음을 혼돈하여서, 율법을 말해야 할 때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말해야 할 때 율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혼돈은 신앙에 혼란을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일어나는 성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율법적으로만 말하거나, 혹은 복음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통한 판단과 복음을 통한 해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서야 성령이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다 (8-10)

(8-9A)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은 먼저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권 혹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정하고 있어, 국민의 나라 즉, 민주공화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과 같이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는데, 그가 강론한 장소는 회당으로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회당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교육하고 율법에 따른 예배를 드리고, 율법에 의해 구성원들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율법의 통치를 받는 중심지가 회당인데, 이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강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비방하는 사람으로 인해, 바울은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강론을 거부하는 것은 율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오용하는 인간의 문제로 인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죄인인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 안에 죄를 역동해, 율법에 저항하고 율법을 이용해 자기의를 추구하게 하여, 우리가 죄인임을 더 드러나게 합니다(롬7:8).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실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창조질서가 담긴 선한 것이지만, 인간은 율법을 바르게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죄로 오염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강론합니다.

(9B-10)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란노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원이라 번역된 스콜레는 강연이나 모임을 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 서원은 여론과 문화가 생산되고 공유되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고, 이곳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이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의 문화와 여론의 요충지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공개적으로 강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사람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대표적인 표적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마12:28). 귀신은 사탄을 추종하는 영적인 세력이고, 사탄은 불법적으로 세상의 통치권과 권세를 잡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귀신이 떠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고 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 중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시험 삼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유대인 중에서도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는데 이들은 마술을 행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변질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능력을 행하는 수단으로 여겼기에, 예수님의 이름도 자신들의 주술적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목적과 소원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귀신을 이길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떠나가기는커녕, 달려들어 그 사람을 이겨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목적이 되며, 하나님이 나를 위한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긴 우리의 목적과 소원이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복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다(11-20)

(18-20)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를 자복하고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됩니다.

바울이 황제의 통치 아래 있는 로마제국의 거점도시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강론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방법도 아니고, 인간적인 실천 운동도 아니고, 윤리의 회복운동도 아니며, 정치활동이나 정책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믿음을 얻으므로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났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지 그 정체성을 얻게 될 때, 그 정체성에 따라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파할 때, 율법이 실현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이 되었습니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로 우리에게 어떤일이 있어났는지 알때, 우리가 무엇을 행할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우리의 전환점이자 터닝 포인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 복음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나라를 우리 자신에게 강론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평안과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창조질서와 율법도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그 은혜를 충만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요한의 세례만 알던 제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묵상해 봅시다.

3. 요한의 세례는 율법을 의미하는데 율법의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율법의 의미와 복음의 의미를 비교하며 묵상해 봅시다.

4.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할때 어떤 일이 있었는데, 회당이 율법의 중심지이다는 점에서 그 일어난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묵상해봅시다.

5. 사도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강론하였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고, 그 일어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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