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21-41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로마,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바울 당시 인구가 25만명 정도였습니다. 3개의 큰 도로를 통해 화물 유통의 요충지가 되었기에, ‘허영의 시장’이라 불려질 정도였습니다. 여러 촌락과 도시의 지역 관리들은 로마와 황제에게 새 신전을 지어 바치고 이로 인해 경제적 부수입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얻고자 서로 경쟁을 벌였는데, 에베소는 1세기에 두 번이나 이 영예를 얻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 된 적이 없었고, 그 지역 출신의 관리가 다스렸으며,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재판을 열곤 했습니다.
상품들과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도시였기에 풍요와 다산의 신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은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로서, ‘달의 신’과 ‘수렵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로 불렸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길이 약 130m, 너비 약 67m, 높이 약 18m인 웅장한 크기의 신전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는 극찬도 있습니다. 신전에는 항상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들었고, 이를 상대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거나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들이 중요한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특히 순례자들의 종교적 열심을 이용해 여신상이나 신전 모형을 팔아 왔던 ‘은 세공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조합을 형성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회 속에서 세례를 주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19:8-10).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이나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19:11). 사람들은 그 능력을 보고 들으며 두려워합니다. 죄를 자복하고 마술책을 불태웁니다. 20절 마지막은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21절부터 41절까지는 “이 일이 있은 후에” 라고 시작하며 세력과 세력이 충돌하는 장면을 그립니다.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마게도냐에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 교회가 있었고, 아가야에는 아테네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도시의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상황을 살피고, 예루살렘 교회에 기부할 것을 독려하려 결심했습니다(롬15:25-28; 고전16:1-11; 고후8-9장). 그리고 최종적으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내가, 반드시 로마도 보아야만 하리라’는 문장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는 자기 안위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이르러야 한다는 예수님 명령의 수행 여부가 중요했습니다. 21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성령 안에서’라는 의미의 구절이 함께 있습니다. 이 결심이 자기 열심히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는 사역이 성공했다고 해서,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든든한 세력이 되었지만 이를 등에 업고 자기 평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외롭고 위험한 여정을 떠나려 준비합니다.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발대로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디모데는 2차 전도 여행 중 사도행전 16장 3절부터 바울과 함께 여정을 다녔습니다. 에라스도는 로마서 16장 23절과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서 고린도 재무관(청지기)이었다고 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을 하던 바울과 만나 복음을 영접했으며,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장기 체류하게 되자, 그를 돕기 위해 찾아와 합류했다가 마게도냐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23-27)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 시기에 은 세공인 조합장이던 데메드리오는 바울과 그 세력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맞습니다. 24절에서 그는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했다고 하고, 25절에서는 ‘우리의 풍족한 생활’ 이라고 표현하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밝힙니다.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와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도 떠났지만(12절),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병과 귀신을 가져오는 신이라 해도 싸워 이기려 했던 것입니다. ‘이 생업’(25절), ‘이 영업’(27절)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27절에서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고 멋진 명분을 들지만, 결국 돈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 중 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도 ‘메시아가 너희 죄 때문에 죽었다’도 아닌,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회는 말합니다. “하나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중요하다.” 거창하고 화려한 명분이 우리를 속이고 설득하려 하겠지만, 그 속에 ‘적지 않은 벌이’와 ‘풍족한 생활’과 ‘이 생업’과 ‘이 영업’을 지켜야 한다는 욕망이 들어 있다면,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28-3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욕망은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분노라는 감정을 삶에 가득 채우고 열정적으로 쏟아냅니다. 소리칩니다. “에베소 사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이 말을 당시 언어로 발음하면 ‘메갈레 헤 아르테미스 에페시온’입니다. 이 말을 2시간 정도 외칩니다. 사람들의 외침으로 요란스럽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듭니다. 일제히, 모두 하나 되어,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감정의 고양, 큰 소리로 요란스러워지는 파급력, 하나 되어 행동하는 실행력, 붙잡고 달려 들어갈 정도의 추진력. 하지만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동역자들에 의해 멈추어 섭니다. 무력하게 주저앉은 것 같았지만, 그는 진리의 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현상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진리나 명분이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는 속과 겉이 일치합니다. 뜨겁기 때문에, 하나 되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닙니다.
(32-34)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본문은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외침을 이기려 목에 핏대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난 군중은 우리 말을 들을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들 또한 결국 누군가에게 ‘선동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사람들이 결국엔 ‘유대인을 향한 편견에 사로잡힌 군중’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편견과 혐오로 진리를 배격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 또한 편견과 혐오에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선동을 주도한 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언변이 뛰어난 알렉산더라는 사람(딤후 4:14에서 구리 세공업자로 바울을 괴롭혔다고 알려진)을 앞세워 변명하려 했으나, 그 변명 또한 성난 군중의 외침에 묻히고 맙니다.
(35-41)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총독을 보좌하여 법령을 입안하고, 각종 기금을 관리하며, 대소 집회를 관장하는 행정관이던 ‘서기관’이 무리를 진정시킵니다. 많은 무장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와 신전지기의 자부심에 맞게 행동하라고 말하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것을 요청합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억울하게 끌려온 것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정식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정당성이 없는 모임은 아무리 뜨겁다 해도 ‘불법 집회’일 뿐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무리는 결국 흩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는 여전히 여정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란 큰 세력이 되었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 거침없이 내려놓고 여정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는 동료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려 하며, 동료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말리고 권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곳이어야 합니다. 선동가 데메드리오를 앞세워 자기 이익을 지키는 조합이 아닙니다. 거창하고 화려한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편견과 혐오와 배제라는 칼을 휘두르는 폭력집단도 아닙니다. 자신들이 왜 소리치고 분노하는지도 모르면서 뜨거움을 이어가는 요란한 무리도 아닙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처럼 선발대가 되어 길을 떠날 수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처럼 억울하게 붙잡혀 위협받을 수도, 바울처럼 무력감을 느끼며 멈춰 설 수도, 제자와 친구임에도 아무런 도움 줄 수 없이 말리는 것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교회’입니다. 그렇게 바울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로마를 향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십니다. 자신의 길을 걷는 이를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 께서 우리를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직면해 견딤으로, 시대와 사회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어주는 통로로 살아가는 하루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력이 흥왕했음에도 복음을 위해 기꺼이 다 버리고 새 여정을 준비하는 바울을 봅니다. 함께하기 위해 먼저 가고, 끌려가고, 말리며, 옆에서 답답해하는 동역자들을 봅니다. 우리가 교회 되게 해주시옵소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거창한 명분으로 선동하지 말게 하시고, 편견과 혐오와 배제의 칼을 휘두르는 폭력집단이 되지 않게 해주시며, 뜨겁고 요란하기만 한 무리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주의하게 해주시옵소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을 통로 삼아 우리를 기어이 땅끝으로 인도해가실, 선하실 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가 자기 세력과 안위를 추구하는 것 아닌지 돌아봅시다.
2. 혹시 오늘 ‘적지 않은 벌이’, ‘풍족한 생활’, ‘이 생업’, ‘이 영업’ 만을 위해 사는 것 아닌지 돌아봅시다.
3. 복음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며 도전해 갈 것인지 생각하며 결단합시다.
4. 편견과 혐오와 배제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아닌지 돌아봅시다.
5. 그저 뜨거움과 하나 됨과 요란함만을 추구하는 것 아닌지 우리 신앙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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