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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0장 13-38절

사도행전 20장 13-38절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한 사람의 족적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것을 따라가느냐는 그 사람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선택의 기로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주님의 뒤를 쫒아갑니다. 주님께서 명하시는 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고 있습니다. 때론 숨이 막히고 포기하고 싶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종 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사명의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종 된 사명자의 자리를 확인하며 나아가십시다.

밀레도까지의 항해(13-16절)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이 새도록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말씀을 듣던 중 졸음에 빠져 떨어져 죽게 되었던 유두고의 생명을 회복시키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드로아에서 일곱 날을 머물렀던 바울은 이제 그곳을 떠나 앗소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 없이 일행들은 배를 타고 보내고 자신은 약 65Km되는 거리를 홀로 걸어서 앗소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만약 바울이 가는 길 중간에 누군가를 만나 격려할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기록하였을 터인데 오늘 본문은 왜 걸어갔는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2절-23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펼쳐질 예루살렘의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바울인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 길을 걸으며 바울은 하나님과 독대하며 기도와 결단의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고난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떤 반응들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바울은 조용히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뜻에 더 집중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묵 속에 주님의 말씀과 자신이 주께 받은 사명을 묵상하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들을 통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길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용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많은 선택과 고민의 기로가 찾아옵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때론 무리를 떠나 주님과 깊은 대화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받는 시간을 가지며 우리의 족적을 결정함이 필요합니다.

(14-16)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사도 바울은 다시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함께 배를 타고 미둘레네를 거쳐 다음날 기오에 이르고 또 그 다음날 사모에 이르고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릅니다. 여기서 ‘이튿날’과 ‘다음 날’이라는 단어가 계속 사용됩니다. 이는 바울의 모습 속에 무엇인가 서두르는 모습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배를 타고 그냥 지나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파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고 만나고 싶은 얼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1년 만에 지나가는 길에서 그들을 본다면 서로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이 오기 전에 예루살렘에 속히 가서 그들이 모았던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정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때론 우리는 정에 끌리기도 하고 개인의 욕심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마음을 억제하고 감정을 억눌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감정과 사욕이 주님의 뜻보다 앞서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절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머물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을 알고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밀레도에서 잠시 만나기를 부탁하며 목회 적 당부를 전하게 됩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고별설교(17-38절)
(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지금부터 나오는 본문은 바울의 공적인 설교는 아니지만 그의 에베소 사역을 정리하며 돌아보고 또한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상황을 믿음 안에 받아들이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첫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행한 바를 알고 있지 않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사도바울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결혼할 때 많은 부부가 혼인 서약을 맺고 알콩달콩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혼생활의 여러 어려움들과 관계적 갈등속에 그 약속은 말라 부스러진 낙엽처럼 사그라지고 맙니다. 취업이 되어 기뻐하며 첫 직장에 출근하며 설레던 마음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해 힘든 시간들을 보내며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첫날과 지금까지의 사역의 태도에 일관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사도바울 스스로 사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안정이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과시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에 더욱 몰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남편과 아내로서 하나님 앞에 약속했던 것, 기도하며 소명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을 잊지 않고 신실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론 우리도 사람이기에 망각하기도 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우리의 느슨해진 신발 끈을 주님 앞에 동여매고 사명의 자리로 힘써 나아가십시다. 그때 사도 바울을 통해 우상숭배의 도시였던 에베소가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게 될 것입니다.

(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임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표현을 보면 ‘성령에 매여’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심령이 성령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는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마음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에 눈이 먼 사람은 명예와 돈과 인기에 마음이 매여 있고 쾌락에 눈이 먼 사람은 하룻밤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 비극은 우리가 매여 있는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고 따라가는 인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 마음이 ‘성령에 매여’있습니다. 비록 그 가는 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자신을 매어 끌고 가시는 분이 믿을만한 분이시기에 사도 바울은 가이드 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믿고 맡겨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이끌어 가시는 분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25-27)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전하며 끝을 전합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임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며 자신이 만난 모든 이에게 힘써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 그들의 피에 대하여 자신이 깨끗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 ‘꺼리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스텔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물러서다, 피하다, 움츠러들다’라는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큰 고민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의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그것은 나를 향한 위협과 공격으로, 오해와 질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영혼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실 것이며 자신이 전한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피 값에 대하여 사도바울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론 어떤 곳에서는 믿는 자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믿는 자의 수가 많지 않고 도리어 핍박과 환난에 처하였으나 결실의 숫자와 상관없이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사명임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때론 어떤 교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몰리기도 하고 어떤 교회에는 평생에 손가락에 꼽히는 교인들만 모이기도 합니다, 어떤 외국나라에는 한 명도 주님께 이끌지 못하고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그 땅에서 살아가기만 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날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곳에서 얼마나 가감 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복음을 진실 되게 전파하였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토브의 말씀을 내 입술과 삶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하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28-30)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이 떠난 뒤에 교회에 찾아올 이단과 거짓교사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는 감독자된 장로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사명의 자리에 세우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심을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로 인해 에베소 장로들은 큰 슬픔에 처했고 사기가 저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에베소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도록 하시기 위하여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셨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를 각 자 섬김의 자리에 서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 누군가의 권면이 있었을 것이고, 또 뜨거운 마음으로 자원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누군가의 부탁으로 섬김의 자리에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분의 피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게 하시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 교회를 섬기게 하신 분은 동일한 성령 하나님이심을 신뢰하십시다.

(31-32)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에베소의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교인들을 누군가에게 부탁합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탁하다는 단어는 ‘파라티데미’라는 헬라어로 ‘어떤 이의 보호와 돌봄에 맡기다’라는 위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죽을지라도 부모의 가르침과 유언은 자녀의 인생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비록 그들을 떠날지라도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또한 박해를 받아 믿음에 시련을 겪을 때에 거짓 교사들의 유혹이 있을 때에 그것을 이겨낼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떠나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 되심을 기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그들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떠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적절한 시기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이별같이 느껴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걱정과 염려가 앞서기도 합니다. 이는 맡겨진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법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를 평생 품에 끼고 살아가는 것이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듯이 때로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한 사람을 다양한 성장의 기회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도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함께 하고 있는 그 시기에 나를 통해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35절에서 사도 바울은 물질에 있어서 사역자로서 깨끗한 품위를 유지하였고 도리어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이득을 위해 복음을 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고자 수고하여 자신과 동행들의 생활경비를 직접 수고하여 채울 뿐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한 구제까지 본을 보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헌신된 사역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여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갔고 또한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절제와 자족과 나눔의 본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돈과 물질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불리는 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으로 생각하며 절제를 넘어 탐심으로, 자족을 넘어 욕망으로, 나눔을 잊고 자신만의 창고를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부와 경제적 이익은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인지, 사도 바울처럼 절제, 자족, 나눔의 가치 안에서 바르게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돈을 우상으로 섬기며 모인 그 돈을 욕망의 침대삼아 안락을 구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말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합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은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인사하며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근심 속에서 그를 떠나보냅니다. 장례식에 가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사람들 특히 유가족과 친인척, 직장동료들의 반응을 보면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해준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 장로들이 크게 울며 바울을 위해 근심해준 까닭입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자신들과 함께 머물며 주었던 사랑은 쉽게 잊을 수 없던 큰 사랑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가정이던 직장이던 교회이던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또 길게는 모든 사람들을 놓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별과 헤어짐을 두고 누군가 울어 줄 수 있다면, 누군가 마음아파 한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걱정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헛되지 않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누린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이별에 슬퍼하는 이가 하나 없다면 그 인생은 억만금을 가졌어도 헛된 인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가상의 장례식, 가상의 이별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 빈소와 헤어짐에 누가 나를 위해 울고, 누가 나의 떠남을 슬퍼해줄지 돌아보며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안에 진심을 다해 서로 사랑하는 복된 관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의 삶은 참으로 주님과 복음과 성령에 이끌리어 불타올랐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을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은 때론 너무 초라하여 나의 안위만 생각하고 작은 고난도 두려워하며 불확실함속에 늘 불안해하는 연약한 모습뿐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띠로 묶어주셔서 두려움을 제하여 주시고 믿음의 담대함과 복음의 능력을 더하여 주사 주님께서 이끄시는 곳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향한 고난의 길이 예비 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길을 토브의 말씀을 배우는 학교삼아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기회로 삼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늘 헤어짐의 때를 묵상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쓰임받기를 기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로 홀로 걸어가며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 22-24절의 고백은 그 시간을 통해 숙성된 신앙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면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가지며 그 선택을 주님 말씀 안에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2. 예루살렘이 결박과 환난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지체하지 않고 그 길을 재촉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삶에 있어서 주님의 뜻 앞에 주저하거나 멈춰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성령에 매여 이끌려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삶을 묵상해보며 내 심령이 매여 있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세상의 성공인지 돌아봅시다.
4. 맡은 영혼들을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맡겨야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만남이 허락된 시간들 속에 어떻게 말씀과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을지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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