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1-14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사도행전 18장 23절부터 시작된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에 관한 행적 중 오늘 본문까지 가장 많은 내용을 할애한 부분이 에베소 사역입니다. 사도 바울이 2,3차 전도에서 유럽의 발칸반도, 오늘날 그리스 땅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목회한 곳이 고린도였다면, 오늘날 터키 서부지역을 뜻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전도와 목회를 한 곳은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상업 중심지였으며 에베소의 원형 대극장은 2만 5천 명을 수용할 정도였으니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대도시를 복음 확장의 요충지로 삼았기에 바울을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목회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전하며 목회할 때 겸손과 눈물 없이 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3년을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던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2차 전도 지역이었던 유럽의 발칸반도로 넘어갔습니다. 거기서 교인들을 보살피며 전도사역을 마치고 되돌아갈 때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지 않고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사적 유익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럽의 발칸반도에서 아시아의 드로아에 도착한 후 지체없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에베소에서 약 55km 떨어진 ‘밀레도’로 이동하였습니다. 비록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지 않았지만, 에베소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마지막 대면 권면이자 고별설교를 위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고별설교를 마친 후, 자신을 보면서 크게 울며 배웅하는 에베소 장로들을 뒤로 한 채 예루살렘을 최종 목적지로 하여 이동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1-6절)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사도 바울의 전도팀은 에베소 장로들을 작별하고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약 70km 떨어진 ‘고스’, 그리고 ‘로도’를 거쳐 ‘로도’에서 약 85km 떨어진 ‘바다라’로 갔습니다. 이렇게 여러 개의 항구를 거쳐 간 이유는 ‘멜레도’에서 지중해 동쪽 해안 지역인 ‘베니게’나 ‘이스라엘’로 장거리 운항하는 무정박 선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라’는 당시 해양 교역으로 유명한 곳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많은 선박이 경유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원했던 해로(海路)는 아시아 남부 연안 항구, 즉 오늘날 터키 남부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선박이나 ‘구브로’, 즉 오늘날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 섬의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가는 경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선박은 경유지 정박 없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큰 상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가 ‘두로’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던 것입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주요 항구 도시였고 갈릴리 북쪽 접경지역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도 바울 전도팀이 ‘두로’에서 일주일 동안 머문 이유는 배로 이동하는데 다음 행선지인 ‘돌레마이’로 가는 배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때 주님의 제자들이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에 닥칠 결박과 환난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7-12절)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두로’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지중해 항구 도시 ‘돌레마이’가 있었습니다. ‘돌레마이’의 위도(緯度)는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이나 뱃새다의 위도와 비슷했습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 일행은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다음 경유지로 이동하였습니다.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돌레마이’에서 ‘가이샤랴’까지는 중간에 갈멜산이 가로막혀 있어서 육로로는 약 50~60km 정도 거리였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 위해 만든 도시였습니다.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Ⅰ)가 여기에 공관을 마련하고 거주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돌레마이’에서 ‘가이샤랴’까지 배를 탔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육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초대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빌립 집사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박해를 피해 가이사랴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고 빌립의 딸 4명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빌립의 딸들이 예언의 은사는 있었지만 사도 바울에 대한 예언의 유무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으며, 오히려 선지자 ‘아가보’가 사도 바울을 찾아와 예언을 하였습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아가보 선지자는 두로에서 만났던 제자들처럼 성령님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의 결박과 환난을 알았지만,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도 바울의 결박이 있을 것임을 말로만 하지 않고 당할 일을 몸소 행동으로 보이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결연한 사도 바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아가보 선지자의 퍼포먼스를 통한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울면서 사도 바울을 막자 바울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상하다’로 번역한 원어는 ‘두들겨 부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울면서 만류하는 사람들로 인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매우 힘든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과 죽음을 각오하였음을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큰마음 먹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희생적인 섬김을 하려고 할 때 누가 적극적으로 만류를 합니까?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가까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려운 봉사, 적지 않은 구제나 헌금, 그리고 금식 기도를 할 때 옆에서 ‘너무 힘들게 하지 마’, ‘그렇게 많이 할 필요 없어’, ‘이제 먹어도 돼’ 또는 ‘조금씩 먹으면서 해도 돼’ 이런 식으로 결연함을 누그러뜨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만류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심히 상하였으니 ‘주님께서 이제 나를 막으시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음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했던 고별설교에 이어 재차 천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사람의 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명심하고 끝까지 수행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로와 가이사랴에서만 아니라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고백하였듯이 성령님이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유럽의 발칸반도에 있는 고린도를 포함한 대도시들을 복음 확장의 요충지로 삼았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세계의 중심인 로마가 복음화된다면 복음의 확장이 더 잘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었습니다(행23:11참고). 사도행전 19장 21절을 보면, 바울은 3차 전도 기간 에베소 사역 중 로마행에 대한 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로마서가 에베소 3년 사역 이후 발칸반도의 고린도로 넘어갔을 때(행20:3)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들을 만나서 가르쳐야 할 급하고 중요한 내용의 말씀을 미리 서신으로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전도 로드맵(road map)을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도 잊지 않았습니다. 14절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확인한 사람들이 했던 말입니다.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을 들은 사람은 사도 바울의 결박과 환난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하나님의 계획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어떤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설령 그것이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처럼 명확하다고 할지라도 그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도 철저히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성령님이 각 성에서 사도 바울의 결박과 환난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닥칠 사도 바울의 결박과 환난을 알았으니 그곳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고난의 장소, 결박과 환난으로 사도 바울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결박과 환난을 왜 알려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합심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너희도 사도 바울처럼 어떤 결박과 환난을 만날지라도 사명감을 잃지 말라’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사명자를 방해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사명자의 결연함이 무모하게 보일 때 아니라고 권면을 할 수 있겠지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생각을 전하되 마무리는 항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이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곧 입성합니다. 과거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선한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사명자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나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죄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투브’(히브리어, 선)를 전하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골고다를 가신 것처럼 사도 바울이 죽을 각오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통해 사명자의 자세를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각자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굳건하게 지키게 하시옵소서. 저희가 맡은 역할이 다양할지라도 사명자의 오직 한가지 목표는 죄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기 위해 말씀의 사람, 그 선하신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여러 곳을 경유해서 ‘바다라’까지 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사도 바울이 베니게의 ‘두로’에 도착해서 그곳의 제자들에게 들었던 말은 무엇입니까?
3. 두로의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배웅할 때 했던 행동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이 했던 행동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4. 아가보 선지자가 사도 바울을 찾아와 예언을 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 사람들과 바울의 반응은 각각 무엇입니까?
5.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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