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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1:27-40

사도행전 21:27-40
찬송가 339장 ‘내 주님 지신 십자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27~37절)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이레가 거의 차매'란 표현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이날은 바울이 야고보와 장로들의 권면을 따라 나실인을 서약한 네 명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각종 희생 제물의 비용을 치러주고 그들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고 경건한 유대인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날입니다. 바로 이날이 눈앞에 있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를 붙들고'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그에게 손을 대다'입니다. 동일한 표현이 예수님께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눅 20:19, 요7:30), 사도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행 5:18,21). 이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그의 사도들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바울도 지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받고 있음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손을 대며 바울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을 펼칩니다.
첫째,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근본 요소인 율법과 성전을 대적한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로, 이들의 이러한 주장의 구체적인 증거로, 지금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바울이 모든 지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대적하려 가르치는 것도 부족하여, 한술 더 떠서 심지어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만이 모여 있는 이곳에는 이방인들이 결코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뜰은 제사장의 뜰 다음으로 성전에 가장 근접한 부분입니다. 더욱이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넘어가는 곳에 분명한 경계의 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출입을 엄중하게 금하는 경고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경고문은 헬라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어떤 외국인도 성전과 주변의 둘러싸고 있는 경계의 울타리를 넘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넘어가다 붙잡히는 자는 누구든지 이로 인해 빚어지는 죽음에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방인이 여인의 뜰로 들어오는 것도 즉시 사형에 처할 심각한 죄가 되는데, 이를 넘어 이스라엘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뜰까지 이방인이 들어왔다고 하면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주장에 심각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이스라엘의 뜰까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실인 서약을 한 경건한 유대인 네 명과 함께 온 것이며,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그들을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붙잡은 다음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 남자의 뜰에 들어오지도 않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찾으려고 온 힘을 쓰고, 바울을 구타하면서 그가 어디에 있냐고 윽박질렀을 것입니다.

(31-32)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로마 주둔군의 최고 사령관 천부장에게 보고가 즉시 가능했던 것은 로마 주둔군이 성전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요새는 30m 정도 되는 높은 망대들이 여러 개 있어서 24시간 보초를 서는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즉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요새는 계단을 통해 성전 뜰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의 출입이 아주 용이했습니다.

(33-35)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두 개의 쇠사슬로 결박하도록 했습니다. 아마 군인들은 한 사슬로 바울의 양손을, 다른 사슬로 양발을 묶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를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인도해 갈 목적이었으나 무리들의 폭력으로 인해 군인들이 바울을 들고 갔다는 사실은 바울의 발이 결박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결박된 사실은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21:10-11)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그를 없이하자'를 직역하면 '너는 그를 제거하라'입니다. 여기서 '너'는 천부장을 가리킵니다. '제거하다, 없이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아이로'는 유대인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했던 외침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으로, 바울이 예수님처럼 고난받고 있음을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 되어 그의 이름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이 이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고난받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 끌려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는 '너는 그를 제거하라'고 외칠 때,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위한 고난도 자신의 사명임을 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정결함을 입증하기 위한 자리에서 한순간에 죄인으로 붙잡힌 바울이었으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지도, 도망치지도, 혈기로 맞받아치지도 않으며, 의연하게 고난을 받아들이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그 자리에서 결코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 속에서, 나를 향해 적대적인 사람을 대할 때, 나를 위해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의연하게 악을 선으로 갚을 때, 우리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37~40절)
(37-39)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바울과 천부장의 이 짤막한 대화는 계단 맨 꼭대기 영문 입구에서입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아주 세련되고 예의 바른 헬라어로 "당신께 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제가 합당하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울이 영내에 들어가기 직전에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건넨 목적은 모여든 백성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이를 허락합니다.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바울은 주목하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히브리 방언 곧 아람어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정결함을 증명하기 위한 성전에서부터 죄인으로 결박되어 계단 위에 오르기까지, 이 모든 일이 삽시간에 벌어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바울을 성전에 가도록 권면한 야고보와 장로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결과였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일을 겪어야만 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성전으로 보낸 야고보를 원망해야 합니까? 아니면 야고보의 권면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야 합니까? 혹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헬라인을 찾으며 자신을 죽이려는 백성들을 증오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환난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환난을 당할 것이 분명함에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과 매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실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의 삶에 펼쳐진 환난과 매임 속에서 원망과 후회로 우리의 인생을 물들인다면, 우리의 인생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고난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더욱 깊이 그리고 바르게 알아가게 되며, 선하신 하나님은 고난을 통로 삼아 우리의 인생에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울의 갑작스런 환난과 매임이었으나, 바울은 천부장의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 히브리어로 수많은 유대인에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복음 증거를 위해 허락하신 놀라운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자리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를 선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에 계획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와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며, 내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결코 원망과 후회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깊이, 그리고 바르게 알아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고, 복음을 증거 할 기회가 되게 하셔서,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야고보와 장로들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선한 권면을 따르다가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어떤 마음을 품으셨습니까?
2.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헬라인을 데리고 온 줄로 오해했고, 그로 인해 바울은 붙잡혀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어떤 마음을 품으셨습니까?
3. 간신히 죽임임을 면한 바울은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천부장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바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 고난 당할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나도 그 각오와 결단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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