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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1:15-26

사도행전 21:15-26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예루살렘으로(15-16절)
오늘 본문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착한 곳은 가이사랴 항구였고,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거리는 3일은 꼬박 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은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니었고, 관광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13)”라고 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요한 목적은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행은 고린도와 마게도냐 각 지역 교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그와 함께했던 사람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이 7명에 바울까지 합하면 8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에서 합류한 누가도 있었기에 바울 일행은 모두 9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몇 명의 제자도 합류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래전 전부터 주님의 제자였던 나손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다 합하면 모두 15명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손이 바울 일행에 함께 했던 이유는 바울 일행이 그의 집에서 머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집을 소유하고 있던 나손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기 위해서 가이사랴에서부터 따라나선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15명 정도의 사람이 한 집에서 숙식을 한동안 하려면, 그 집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나손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그 사람들을 모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큰 집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자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 하기에 눈치를 보기 쉽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투옥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나손은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바울 일행을 섬기려고 가이사랴에서부터 동행했습니다.
구브로 출신의 나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왜 가이사랴에 가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 바울 일행을 왜 예루살렘의 자기 집에 묵게 해 주려 했는지는 성경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신비한 손을 내밀어 역사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로 가득합니다. 평소에는 잘 인지하지 못해도, 인생에서 매듭을 지어야 할 순간에 지난날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야고보를 방문하다(17-26절)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마침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이 방문은 바울이 회심한 후 4번째이자, 그의 생의 마지막이 됩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모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맞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이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인지, 이방인 신자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이 가는 곳마다 이런 몇몇 형제들이 맞아주었습니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을 만났습니다. 돌에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그들을 피하려고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를 만날 때마다 도와주었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찾았습니다. 바울이 만난 지도자들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는 사람은 야고보뿐이었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사도행전 15장에서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바울과 야고보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만난 이후로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은 사역 보고를 하면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바울의 사역 중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물론이고, 병자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가서 환부에 얹기만 해도 병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또 많은 마술사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책들을 불살라 버리는 일도 일어났으며, 심지어 창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를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자신이 행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정말 큰 일을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도 바울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뭐 제가 한 게 있나요! 하나님께서 하셨죠. 뭐!”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꼬리 한쪽이 살짝 올라갑니다. “그럼, 나 말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통로로 삼아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전도사역을 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이 보인 반응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20a)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듣고서, 바울에게 큰일을 했다고 찬사를 보내거나, 수고 많았다고 덕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이방인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바울의 능력으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셨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0b-21)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사도행전 8장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큰 박해로 말미암아 사도들 외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믿는 유대인이 수만 명 있다고 합니다. 아마 박해 때 흩어졌던 사람들이, 박해가 느슨해지거나 사라지자 돌아오기도 했을 것이고, 또 새로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복음과 율법을 함께 지키며 사는 그리스도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바울에 대한 소문은 세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 소문은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이었는데,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통하지 않고 율법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지, ‘율법 자체가 필요 없다’라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소문은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구원의 통로로 생각하고, 할례를 받는 것과 구원을 받은 것을 동일하다고 하니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지, 할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지, 내가 세례를 받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에게 할례를 베푼 일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소문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공휴일이나 명절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해외에서 삼일절, 광복절을 비롯하여, 추석, 설날 등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해외에 사는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의 달력이 아니라, 살고 있는 그 나라의 달력에 따라서 삶의 리듬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소문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 대한 잘못된 소문으로 인해서 그가 ‘모세의 배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2-23a)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유대인의 관심을 무시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소문을 믿지 않고,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결책을 일러주었습니다.

(23-26)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교인 중에 서원한 사람이 네 명이 있는데, 그들이 서원이 막 끝나게 되었다며, 그들과 함께 결례(purification)를 행하고, 그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결례는 문자 그대로 ‘정결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너무 오래 떠나 있으면 그 몸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명절을 맞게 되면 그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 역시 성전을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여느 유대인들처럼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가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명은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은 보통 30일 정도를 했는데 그 기간이 끝이 나면 성전으로 와서 머리를 깎으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예물로는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 속죄제물로 암양 한 마리, 화목제물로 수양 한 마리 외에도 무교병과 과자 등(민 6:13-)을 드렸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 비용을 대신 담당하는 것을 굉장한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바울에게 담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모세의 배반자로 여기는 그릇된 오해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정결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의 바울의 모습이 굉장히 치사하게 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무슨 결례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과 타협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바울은 변절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자유롭지만,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강철과 같았지만,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갈대와 같았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고, 그가 하나님의 선대하심을 받았기에, 자신도 그 하나님의 선대하심의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선대하심의 통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소문을 근거로 자신들의 생각 속에 또 한 사람의 바울을 만들어 놓고서 그 사람이 진짜 바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고 속에 사람을 가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소문을 전하는 우매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이 더 많은 사람을 복음 안에서 얻기 위해서 열린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해 주셨듯이, 오늘 하루 우리도 하나님의 선대하심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구브로 출신의 나손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에 바울 일행을 머물게 하려고 가이사랴에서부터 따라나섰습니다. 당신의 인생길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을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또 그런 사람이 되신 적이 있습니까?
2.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사역을 보고하면서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어떠합니까?
3. 사도 바울은 결례를 초월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기꺼이 결례를 행했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유연하십니까? 날이 갈수록 유연해집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4.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데는 강철같이 되고, 비본질적인 것에는 갈대와 같이 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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