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30-23:11
찬송: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고된 삶에서 우연히 만나는 해학적 요소들은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고되고 힘든 인생이지만 잠시나마 활짝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와 행복을 놓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감이 있어도, 경제적 어려움에 주름이 깊어져도 늘 심각하거나, 늘 슬플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웃을 일을 찾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웃게 되는지 생각해봅시다. 예상되던 흐름을 벗어나 예측 못한 행복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웃게 됩니다. 여성의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예고하시자, 사라는 웃었습니다. 나도, 남편도 노쇠하였는데, 무슨 즐거움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허락하시자 사라는 실소가 아닌 진정한 웃음을 웃었습니다.
(창세기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도행전 안에서도 해학적인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본문은 그중에 한 부분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바울이 공회에서 공회원들을 대상으로 증언해야 하는 긴장된 상황입니다.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는 공회원들 앞에 선다는 그 팽팽한 긴장을 깨고, 매우 어설픈 부분들이 등장함으로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긴장감이 아니라 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최고 권력자라고 생각하며 바울을 심문하고 있으나, 결국 11절에서는 진정한 최고의 권력자는 우리 주님이심을 보여주며 독자들이 웃게 만듭니다. 공회를 이루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바울이 “나는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받노라” 이 한 마디에 공회를 싸움터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실소를 품게 됩니다.
긴장된 상황에서도 그 안에 해학적 요소들을 둠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세상이 잔혹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후로 잠시도 평안할 날을 보내지 못했고, 지치고 힘든 긴장감 속에 웃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들려주는 공회에서의 이야기는 지친 그리스도인들의 긴장을 풀게하고 웃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너희를 치던 적은 어디 있느냐? 너희를 억누르던 원수는 어디있느냐? 집요하게 괴롭히던 이들의 실체를 보니 어떠하냐?” 물으시는 듯합니다.
바울처럼 공회와 힘 있는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불안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오늘의 본문은 분명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가 권세를 잡았다고 하여, 바르게 믿는 것으로 인해 공회에 넘겨진다고 하여, 내일을 그려내지 못할 상황이라 하여,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의 포악함 속에서도 반드시 진행되며,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굽혀지지 않은 이상 우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알려주며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듭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당시 최고의 정치, 종교 권력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적대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종교 권력에 대항했고, 유대인의 질서를 흐트러뜨린다는 명목으로 붙잡힌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결박을 풀어주고 제사장들과 공회원 앞에 세웠습니다.
(22: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지금 바울 곁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바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 할지라도 공모하여 죽이려 계획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의 기세는 사도들의 시대에도 여전히 높고, 그들은 힘을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거짓과 속임수로 예수님에게 그러했듯, 바울에게 거짓을 덮어씌워 감옥에 가둘 수도, 심지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고백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바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도 전혀 눈치보지 않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에,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겼고,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복음을 이용하는 종교 장사꾼이 아니었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내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지략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복음으로 굶기도 하고, 복음으로 목숨을 잃을뻔하기도 하고,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배신도 당하는 참 서글픈 삶입니다. 그러나 돈과 힘은 없을지라도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참 예수쟁이요, 참 하나님 앞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당시 듣는 모두의 마음과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종교 장사꾼으로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을 찔리게 만들었고, 시커먼 속내를 들켜버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아무 힘 없는 초라한 사람의 근거 없는 외침이라 생각해 무시해버리는 마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아나니아는 네베다에우스(Nevedaeus)의 아들로, 헤롯 안티파스 2세 때에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친로마정책을 펼치다가 훗날 셀롯당에 의해 암살된 사람입니다. 그는 성격이 난폭했고, 사람을 잘 때렸으며, 십일조까지 탈취할 정도로 재물에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역사서는 기록합니다. ‘시온’이라는 거룩한 의미의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하나님을 도구화하였고, 종교로 밥을 벌어먹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라는 종교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친 입으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공회원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주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서 판별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갑자기 마음먹었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쌓아왔느냐, 어떻게 살아왔느냐로 사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치라 명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인격과 마음이 지금까지 그렇게 사람을 대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이라는 직책으로 영적 권위를 표현할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보는 것으로 권위있게 보일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우 저급하고 부끄러운 말이었고 그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매우 통찰력 있는 말을 합니다.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아나니아의 말을 듣고 바울은 아나니아가 매우 천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대제사장임을 알았으나 수준낮은 언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라는 말에 지혜롭게 인격과 상관없는 경의를 표하는 말을 합니다.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과 아나니아가 주고받는 언어의 티키타카에서 바울은 인격을, 아나니아는 저급함을 가져갔습니다.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으로서 품격에 맞지 않는 성급한 말로 인해 자신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바울은 율법에 근거한 거친 표현을 하면서도 사람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언어도 사용하는 여유를 가졌습니다. 대제사장과 죄인 바울이 역전된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바울이 한 마디로 공회를 분열시킨 웃긴 상황입니다. 공회 구성원이던 바리새인은 극심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리스 로마 중심의 헬라 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세대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 고유의 문화와 종교인 헤브라이즘을 고수하기 위해 철저한 율법적 생활과 유대교 신학을 계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도 이런 바리새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공회의 다른 구성원인 사두개인은 다윗 시대의 사독계열 사람들로 마카비 시대까지 대제사장직을 유지하다가 지금은 친로마 정책으로 전환하여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과 영의 존재, 내세를 믿지 않고 오직 현세적인 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공회의 상황을 파악한 바울은 한 마디로 자신과 공회와의 싸움구도를, 자신은 제 3자가 되고 공회 구성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끼리의 싸움으로 바꿔버립니다.
(6-8) 바울이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70명으로 이루어진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원의 기능을 했습니다. 그 기원은 모세가 세운 70명의 장로들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최고 의장으로 장로들, 서기관들이 구성되었고, 각종 종교 생활에 대해 재판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세력화하여 자신들을 견제할만한 종교 세력들을 무참히 짓밟는 일들을 자행해왔고, 각종 기득권을 소유한 채 절대 나누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연합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을 만큼 절대적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하나의 주제만으로도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허상이었고, 그 조직구성이 야합에 불과한 것이며,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태한 조합임을 한 번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위선과 탐욕을 가리기 위해 종교적 허울을 덮어쓰긴 했으나,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어설픈 허상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합니다. 오히려 권위로 포장한 그들의 화려함이 불쌍해보이기까지 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종교 장사꾼으로 앉아있는 공회원들과, 방금 결박에서 풀려나 초라한 몰골의 바울을 상상해봅시다. 어느 쪽에 진정한 힘과 권세가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이 시대에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또 다른 해학적 요소입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다툼이 격렬해져 바울의 몸이 찢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즉각 개입하여 바울을 보호합니다. 공회는 분명 바울을 죽이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바울을 누구도 해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결박했던 군인도, 바울의 입을 치라 명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화려한 옷을 입은 힘 있는 공회원들도 바울에게 위력을 가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바울의 삶과 일반입니다. 두려우십니까? 앞이 캄캄하여 답답하십니까?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박당한 듯 답답하고, 행색은 초라하며, 사람들은 혈기로 나를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 앞에 나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다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본문은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보며 웃으라 말씀하십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삭개오를 무너뜨리려고 비난할지라도 주님의 이름 불러주심에 삭개오는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받아왔던 여리고 사람들의 조소는 주님의 이름 불러주심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이름 불러주심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역전이 곧 찾아옵니다. 인간의 계획은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만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두려워한 것이었는지요? 무엇에 호흡이 가빴고, 무엇에 마음이 닫혔으며, 무엇에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는지요?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님에도 왜 그토록 한 걸음도 못딛었는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역전을 바라보지 못한 우리의 믿음 없음이었습니다. 결박된 것도, 나의 입을 치라 명하는 저 권세자도,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선 상황도, 내 몸이 찢길 것 같은 위기도 모두 하나님의 역전에 비로소 웃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리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빠져 현실의 고난을 향해 넉넉히 웃어주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대제사장 아나니아,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입장이 되어 자신들의 권력과 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품었을 법한 생각들을 기록해봅시다.
2.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바울의 입장이 되어 바울이 품었을 법한 생각들을 그의 행적에 따라 기록해봅시다.
3. 결국, 아무도 바울을 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위기의 상황을 벗어난 바울이 어떤 웃음을 지었을지 묵상해봅시다.
4. 주님은 바울을 로마에 보내셔서 증언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울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지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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