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5
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죄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기에 행해집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끝없이 반역하는 인간의 죄와 그럼에도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한 인간과 그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지난 3장에서 시작된 죄는 이번 4장에서 확산되어 갑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1-7절)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과 하와는 첫째 아들 가인을 낳고 감격에 벅찼습니다. 왜냐하면 새생명 가인의 출생은 에덴 밖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고백했고,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아 ‘얻음’이라는 뜻의 ‘가인’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지은 불순종의 뼈아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출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첫째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허무’라는 뜻의 ‘아벨’이라 지었습니다. 가인을 낳고 감격가운데 살아갔지만 그 행복이 에덴동산에서의 삶과 비교될 리 없었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나는 것에 대한 허무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 자체를 목적 삼으면 그 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이라 지으며, 자신의 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살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아우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흐’는 피와 살을 나눈 관계, 즉 한 몸 되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사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사랑할 대상을 맡겨주셨습니다. 그 후 가인과 아벨의 직업이 나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 목축업에 종사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 인생에게 사랑해야 할 사람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을 맡기십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지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츠’는 정해진 기한이 다 되었음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서 주로 심판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평가하고 심사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와 더불어 일을 주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시지만 기한이 차는 그 날, 반드시 우리를 살피시고, 셈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에게 그 날이 이른 것입니다. 그 날에 가인은 자신에게 맡겨졌던 농사일을 통해 얻은 소산을 제물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도 그렇게 행했습니다.
(4-5)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과 같이 아벨도 자신에게 맡겨졌던 목축을 통해 얻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 둘 다 형식은 잘 갖추어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반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벨은 제물과 함께 자신을 드렸지만 가인은 자신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벨과 그의 제물’ 및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지 않으시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인격도 받으셨습니다. 이때 그 순서를 보면 인격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제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먼저 보십니다. 따라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만 제물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도 제물 삼아 드렸지만, 가인은 자신은 드리지 않고 땅의 소산만 제물삼아 드렸기에 상반된 결과가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신자반에서 배웠듯이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만 남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벨은 제물 되어 사라졌지만 가인은 뻣뻣하게 남아있었습니다.
둘째, 가인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5절 하반절에 나온 가인의 반응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자 가인은 분을 내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그분이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면 두려움 가운데 자신의 제사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역정을 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은 갑으로, 하나님을 을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 받을 분이 아닙니다. 중심은 드리지 않고, 제물만 드리며 그것을 받으라고 강요하는 가인의 모습은 하나님을 거지로 만드는 모욕적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그분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낱 인간의 수장인 왕이 은혜를 베풀어도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당연함이 아닌 경외와 감탄으로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를 무시한 채 하나님께 성을 내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이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마땅할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돌이키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가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기 직전에 놓인 가인에게 다가와 경보를 울리셨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어찌 됨이며 … 어찌 됨이냐”라고 두 번 반복하시며 가인이 성을 내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지 않을 시 죄가 곧 그를 삼킬 것임을 경고하시며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때만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가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8-15)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하나님께서 경보를 울려주셨음에도 가인은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기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에도 그 이유를 아벨에게서 찾으며 질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집이 아닌 들로 데리고 나가 죽였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도 보실 것 같지만 사람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도 보지 않으실 거라는 죄인의 전형적인 생각이 반영된 장면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코람데오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경히 여기며 욕심을 따르다가 스스로 죄에 빠진 가인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오십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가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며 물으셨습니다. 살인죄를 지은 가인에게 죽음의 선고만이 공의임에도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기 이전에 질문하시며 돌이킬 기회를 은혜로 베푸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맡겨주신 형제, ‘아우 아벨’이 어디있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에 대해 물으실 때 삶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여전히 마음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은 그의 대답에서 드러납니다. 즉결처형이 내려져야 마땅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콧방귀를 뀌듯 거짓말로 응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랑의 의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반항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10-12)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를 시작으로 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아우의 핏소리 즉, 죽은 아벨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땅을 다스리며 살아가도록 사명을 받았던 가인은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자기 뜻대로 살아간 결과 도리어 땅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땅의 저주를 받아 아무리 노동해도 땅으로부터 소산을 얻지 못하고 피하고 유리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처럼 가인은 스스로 저주를 불러들였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끝까지 항변합니다.
(13-1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의 대답은 뉘우침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반대입니다. ‘죄벌’이라는 단어는 죄 자체가 아닌 죄의 결과로 임하는 벌을 뜻합니다. 가인은 자기 잘못에 비해 과도한 형벌이 주어졌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가인은 자신에게 내려져야 했을 형벌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기 위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전인격으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더라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전이 진노의 자리, 곧 사망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사망에서 건짐 받은 삶 자체만으로도 영원한 감사의 이유가 있기에 어떤 수모와 고난을 앞에 두어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인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불평과 원망으로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끝까지 눈이 어두운 가인에게 하나님은 끝까지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표를 주십니다. 표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트’는 출애굽 당시 열번째 재앙 때 문설주에 바른 피를 가리킬 때도 쓰였고, 이사야 7장의 처녀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를 상징할 때도 쓰였습니다. 즉, 구원자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예표하는 이 표는 가인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였습니다.
가인이 끝없이 죄를 더해감에도 하나님은 끝없이 은혜로 다가가셨습니다. 그 결과 가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는 이전의 죄를 버리고, 생명을 보호하시겠다며 표를 주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 살지 아니면 이 은혜 역시 거부할지 경계선에 놓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가인과 같이 반항하는 죄인인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 이름을 죽음의 족보에서 지우고, 생명의 족보에 기록해주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가인과 같은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아벨과 같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 앞에 마땅히 아벨과 같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끝없이 반항하는 가인조차 끝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들었습니다. 사망이 종착지였던 우리 인생을 십자가로 바꾸시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신 은혜를 잊지 않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와 내일 있을 주일예배 때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며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아벨과 같은 참된 예배자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음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감격했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기뻐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2.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사랑할 대상을 맡겨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사람에는 누가 있으며,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책망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최근 당신의 예배는 아벨처럼 중심을 드리는 예배였습니까? 가인처럼 중심은 드리지 않고 제물만 바치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모습은 없었습니까?
5. 은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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