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18-35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누가복음의 초반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병렬로 기록하며 소개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이 옥에 갇힌(3:20) 이후부터 그에 대한 언급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장이 지난 오늘의 본문에서야 요한이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다시 언급된 요한, 그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과 그 사역이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질문(18-23절)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이 모든 일’, 곧 17절에 언급된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본인의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들었습니다. 18절에 기록된 ‘이 모든 일’이라는 단서는 앞선 두 단락(1-17)이 오늘의 본문이 연결되고 있다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이는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질문이 앞 선 두 단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에 기인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제자들로부터 들었던 메시아로써의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이 생각했던 메시아상과 정확하게 일치하거나 충분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고 자기보다 능력이 많은 이를 언급하며 이렇게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메시아를 알곡과 쭉정이를 걸러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는 심판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모습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제자들에게 듣고, 그들을 보내어 자신이 지금까지 예견했던 그 분이 맞는지를 예수님께 직접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의 질문은 매우 짧았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이 있는 구체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오실 그이’라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이라는 의미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맞는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사역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구원사역이 맞는가를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질문의 과정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려고 했다기보다 말씀을 통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더 곤고히 하려고 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두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답변하셨습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 이사야(35:5-6, 61:1)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에 입각하여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원래 구약에서 예언된 진정한 메시아의 사역이었습니다. 심판자로 메시아의 사역을 국한한 요한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으로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 곧 구약의 예언을 잊은채, 로마에 속박되어 있어, 이 상황을 극복하게 해 줄 메시아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에게도 진정한 메시아의 사역이 이것임을 일깨워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요한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알곡과 쭉정이를 거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심판자의 역할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현재 수행될 사역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미래에 있을 역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으로 반응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있던 요한도 자신이 그리는 메시아상과 예수님의 사역이 일치하지 않자, 예수님께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삶의 기준에 국한시킴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큰 일을 가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이 거듭되고, 열심이 더할수록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더욱 곤고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을 향해 요한과 같이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요한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요한은 이러한 질문의 과정을 자신의 확신을 더욱 곤고히 하는데 사용했지만, 우리는 질문이 의심에서 출발하기가 빈번할 뿐 아니라, 질문 후에 스스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을 떠나 살 것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로 확신으로부터 출발된 질문을 드리는 신앙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에 견고함을 더해 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거듭되고, 열심이 더해가면서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나님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의 생각을 겸손히 내려놓고, 지금 우리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의 신앙은 한차원 더 진보하게 될 수 있음을 요한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24-30절)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광야에 갈대를 보기 위해서 가거나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대에 대한 해석으로 요한이 사역을 하던 장소의 풍경을 암시한다거나 풍채가 그리 좋지 못했던 요한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좋은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한 비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광야를 찾아 나갔던 것은 광야에 있는 갈대나 화려한 패션을 보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참된 선지자를 보러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선지자 이상의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시대를 열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출생하던 때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 곧 예수님의 시대였습니다. 요한은 이 시대를 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자신의 앞서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이는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은 여느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선포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끔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의 실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사역을 하고 있는 요한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위대함은 새로운 시대의 축복과 유익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견줄 바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더 큰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이전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가교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조금 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한의 세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나뉘었습니다.
(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백성들과 세리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요한의 세례 가운데 나아왔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와 같은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적대적인 태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결국 자신들이 회개해야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잊게 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메시아 앞에 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메시아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회개가 아닌 거절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또한 각자의 신념의 틀에 갇히는 신앙생활을 배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번 갇혀버린 신념의 틀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빠져나오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아무리 읽고 들어도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함을 겸비해야 합니다. 나의 신념에 말씀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는 말씀에 대한 선이해를 내려놓고, 말씀을 낯설게 보며,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메시지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념이었다면, 회개하고 이 말씀으로 새롭게 나아가는 겸손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31-35절)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들과 더불어 놀려고 하지 않는 어린아들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요한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천박하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보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 자녀들’, 곧 요한과 예수님께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그 옳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오늘 본문이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맞춰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에 그 방향을 선회하여, 희망으로 이어갑니다. 메시아를 보냄으로 소외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얻지 못하고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그 구원의 계획을 실패 없이 반드시 이뤄가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유대의 지도자들은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축복, 곧 구원으로의 초청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복음의 마지막까지 그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신념과 신앙 사이 그 어디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우리 믿음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일하심의 역사는 순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결국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나의 신념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십자가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구원의 초청에 응하며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외모는 멀쩡한 것처럼 꾸민다고 해도, 일그러진 한센병자와 같은 우리의 자화상은 꾸며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치장한다고 해도, 신념의 틀에 갇혀 절대 변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속사람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유대 지도자들의 한계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그러진 모습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면을 가지고 나아가 “에피스타테스”, ‘내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 ‘나를 새롭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주님께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릇된 신념을 참된 신앙으로 변화시키시며,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우리의 힘이신 여호와께 기대어, 문드러질대로 문드러진 세상 속에 나아간다면, 세상을 위한 하나의 백신이 되어,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주님의 통로로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요한이나 유대의 지도자들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바르지 못한 신념이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같이 신념을 놓지 못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요한과 같이 바르지 못한 나의 신념은 내려놓고 신앙의 확신을 도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우리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내려놓지 못하는 신념의 짐을 바라보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문제의 해결자 되시고자 하시는 에피스타테스, 주님께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 또한 허락해주옵소서.
또한 우리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향한 백신이 되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거하도록 사용되는 주님의 통로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믿는 하나님과 실제의 하나님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2. 당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는 신앙을 가장한 신념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3. 당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져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또한 이런 경험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4. 지금까지 내면에 세웠던 당신의 신념을 없애고 변화를 요구하시는 여호와를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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