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27-49절
찬송가 204 ‘주의 말씀 듣고서’
원수를 사랑하라 (27-36절)
누가복음 6장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은 사건과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오해와 달리 율법의 정신은 속박이 아닌 자유이며, 부정이 아닌 긍정이고,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행동과 존재 양식입니다.
(로마서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하지 말라는 율법 계명도 결국 하라는 긍정의 명령, 그것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축약됩니다. 그런데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가장 자유롭게 해야 마땅한 안식일도, 사람을 구속하고 제한하는 규례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긍정을 향하고 있습니까? 부정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은 하지 말라 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라 입니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사도라 칭하신 후에 평지로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보시며 복과 화를 선포하시고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보다도 훨씬 멀리 나아갑니다. 우리의 이해도 아득히 초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듯이 원수의 모습과 우리의 대응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원수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 너의 뺨을 치는 자, 네게 빼앗고 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즉 잘 대해주고, 기도하며,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많이 걸립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가? 지금 나에게 욕하고 때리고 저주하는 자를 어찌 잘 대접하는가? 내 소유를 다 빼앗기도록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가? 죄와 악인을 통제하지 말라는 말인가? 과장법에 불과하지 않는가?
원수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개인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만 22절 말씀을 보면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즉 원수란 나에게 인간적으로 섭섭하게 굴거나 나를 못살게 만드는 존재라기보다는, 예수님 때문에 나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대적자들이 나에게 가하는 모든 어려움과 악을 선으로 갚아주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저주와 모욕, 구타와 약탈은 사실상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의 참된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 이야기를 하신 이후에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너희도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으로 도약을 시도하십니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은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십니다. 바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것이 구약의 전부라고 정의하십니다.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회에서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 남을 나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 이를 황금률이라고 하여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틀림없는 절대 명제로 신봉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조금 달라집니다.
(32-34)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선대하는 자에게 잘해주는 것이나, 받기를 바라고 꾸어 주는 것은 칭찬할 거리가 전혀 없고,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일은 죄인도 하는 당연지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35-36)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제 사고의 대변환이 일어납니다. 이웃사랑에서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베풀라고 하십니다. ‘바라지 말고’라는 말씀을 난외주에 보시면 '아무에게도 실망하지 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남이 똑같이 대해주든 그렇지 않든 무조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 아버지가 너에게 자비로우셨던 것처럼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명령이며, 그렇게 되었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닮아 은혜를 모르는 자,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원수의 범위도 무한대로 확장됩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남이 나를 사랑해 주는 만큼, 아니 그 이상 아무리 사랑해도 그 기준이 나라면 아직 율법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도 얼마든지 그렇게 합니다. 옛 계명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또는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대접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로 바뀝니다. 이제 기준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내가 사랑받은 만큼, 사랑받을 정도 만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비로운 자의 행동양식 (37-45절)
(37-38)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지 않습니다.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용서하고 베풀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셨느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비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정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갚아주셨기 때문이며, 남을 헤아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헤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소극적인 자세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자신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의 근거를 온전히 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마치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고 죄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최후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 원수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원수를 정한다면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과연 공정하게 원수를 규정할 수 있는지, 나는 누구에게도 원수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원수였는지, 얼마나 몹쓸 짓을 서슴지 않았는지 숙고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행위대로 갚아주시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베푸셨다는 진리가 와 닿기만 하면 이 말씀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내가 주님의 원수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뺨을 치고, 겉옷을 뺏고, 갈취하고 가져갔으며, 주님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고, 드리지 않고, 헤아렸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원수 된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고 모든 것을 감내하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행동지침을 내세우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원수가 하는 악랄한 짓을 가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도 보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셨다는 선포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을 도덕률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원수와 대적자 된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기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우리가 그 사랑을 참으로 힘입었는지 물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39-40)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로 옛 율법에 얽매여 있는 자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맹인으로 몇 차례 언급하시며, 그들이 추종자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될 자는 누구를 따를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왜곡된 율법 정신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율법을 온전히 완성한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온전하게 되면 예수님과 같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의구심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실제로는 원수를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마음은 혹여나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실천으로 옮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1-4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눈에 티가 들어가면 굉장히 따갑고 불편합니다.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 티를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대들보를 박은 자가 나타나더니 네 눈에 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자기 눈에는 대들보가 박혀있는데 말입니다. 눈에 티가 있어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고 애를 태우는 친구와 대조적으로, 그는 엄청난 고통과 무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남을 바라보며 지적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나의 원수다. 이 한심한 작자여! 이미 눈에 들보가 박혀 죽어버렸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눈에 들보를 빼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몹쓸 놈이었는지 깨닫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티가 있는 이들에게 무어라고 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하고 적개심을 불태우는 이들에게 주님은 네가 먼저 내 원수였다! 네가 먼저 죽일 놈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다는 진리를 깨닫는다면, 티끌 때문에 다른 이를 비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1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500데나리온을 내놓으라고 드잡이하지 않는 법입니다.
예전에 50억이 들어 있는 통장을 가지고 다니는 노숙인에 관한 뉴스를 봤습니다. 그분은 한 달에 받는 이자만 1000만원이 넘었습니다만 호텔이 오히려 감옥같이 여겨져 노숙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상해 보여도, 그 사람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숙이 좋기에 그렇게 산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수 사랑이 아무리 무력하고 한심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우리 안에 있고, 그 무한한 가치를 알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면 가장 강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됩니다. 나의 생명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 마음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수 사랑은 죄책감에 허덕이도록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면 속 사람 자체가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 좋은 나무와 선한 사람이 된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43-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여 내 자신이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존재 자체가 변화되면 그 존재에 합당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원수 사랑은 그저 표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수인 나와 하나 되신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모시면 자기를 죽이는 자들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나아와 듣고 행하는 삶(46-49절)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어찌어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실천합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반문하십니다. 참 이상하다! 주여 주여 입으로는 부르는데 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47절 말씀에는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들었으면 행해야 합니다. 들은 대로 행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두 집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한 집은 탁류가 나도 흔들리지 않는데 한 집은 완파되어 버렸습니다.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두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남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깊이 파면 팔수록, 든든한 주춧돌을 두면 둘수록 그 집은 튼튼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행해야 합니다. 입을 떼고 몸을 움직일 때 하나님은 힘을 주셔서 행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인생의 탁류에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굳건하게 섰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원수 사랑의 땅을 파고 주춧돌을 든든히 세우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종 되었음과 부활의 증인 되었음을 보이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원수 사랑하라는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흘리지 않게 하옵소서. 자신을 부정하시면서까지 원수된 우리를 긍정하시고 품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하시고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 나왔으면 듣게 하시고, 들었으면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 접붙임되어 선한 나무가 되고 마음에 선을 쌓아 선을 내게 하소서. 원수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기꺼이 원수를 위하여 죽게 하소서. 우리는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하고 인자하게 살도록 힘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철천지원수가 있으십니까? 왜 원수가 되었습니까? 왜 용서하지 못하셨습니까?
2.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서 진지하게 고민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3. 원수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도덕률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푸신 하나님의 자기 선포라는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본문에 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4.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원수를 사랑할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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