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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8:16-25

누가복음 8:16-25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 먼저 한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4월 27일) 현장 새벽기도회를 재개합니다.
가능한 한 지금처럼 당분간 인터넷으로 참여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꼭 참여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①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십시오.
② 교역자가 비접촉 체온계로 발열 체크를 하겠습니다.
③ 예배당 입구에 비치된 소독제로 손을 소독해 주십시오.
④ 참석하시는 분들은 이름과 전화번호 등 신상기록을 남기셔야 합니다.
이 4가지는 정부의 방역지침이니 꼭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오시면, 적절한 거리 두기를 위해서 좌석에 표시한 곳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기는, 최근에 해외에 다녀오시거나 몸에 열이 있으신 분 그리고 연세가 높으신 교우님은 댁에서 인터넷으로 새벽기도회에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16-18절)
오늘 본문은 등경 위에 두어야 하는 등불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18절은 ‘등불 비유’, 즉 등불을 켜서 등경(등잔걸이) 위에 두는 이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후에 ‘등불 비유’를 하셨습니다.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전등을 켤 수는 없다 할지라도, 불을 켤 수 있는 라이터나 성냥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리고 라이터나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불을 꺼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줄여 놓고서,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불을 밝게 해서 등경 위에 두고 생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불을 어떻게 켜는지’나 또 ‘그 불을 어떻게 간수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비유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산상수훈에서는 소금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는 것이 곧,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등불을 켜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은, 또한 이 세상은 ‘어둡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두움의 일이 정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한 사람을 지배하고 나면 얼마나 추해질 수 있고, 얼마나 타락할 수 있으며,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해서 매일 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은, 또한 이 세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라는 것입니다. 달빛도 비치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길이나 산길을 헤드라이트가 고장이 난 자동차를 운전하여 가는 것 상상이 되십니까? 가로등이 모두 꺼진 고속도로에서 헤드라이트가 없이 질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세상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운전하면서도 자기 헤드라이트가 고장이 난 줄도 모르고 달리고 있습니다. 자기 헤드라이트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니까 잘 작동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두운 곳이고, 그곳에 그리스도인만이 등불을 켜서 빛을 비출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표정하게 있다가 갑자기 재채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채기하려는 사람의 표정만 바라봐도 재미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사흘에 한 번씩 감던 머리를 하루에 두 번씩 감습니다. 또 여자는 화장하는데 더 공을 들이기 시작하고, 옷장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할지라도, 빛이 있으면 그 주위는 밝게 되어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빛은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말씀을 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말씀의 빛이 그 사람을 통해서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동일한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동일한 결실을 맺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동일한 양의 빛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18절 하반절은 달란트 비유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한 주인이 다른 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세 종을 불러서 재능대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셈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역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 두 종은 주인에게 칭찬을 듣고 주인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25:24-25, 새번역)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25:26-28, 새번역)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우리 생각에는 주인이 열 달란트 있는 사람에게, “네가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한 달란트만 주면 좋겠다.”라고 말해서, 세 종이 각각 9달란트, 4달란트, 2달란트를 가지게 되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오히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이미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29)

오늘 본문과 동일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그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더욱 깊은 학문의 길로 가게 되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학생은 공부를 더욱 등한히 하게 되므로 결국은 이전에 조금 알았던 마저 모르게 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의 신앙이 진실해지고 진지해집니다. 말씀을 존중할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19-21절)
19-21절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19-20)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때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알 세 불(Beelzebul) 논쟁’, 즉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을 때라고 증거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동생들은 친척들의 말이 사실인지,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전히 인간적인 염려에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가족은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찾아온 가족들에게는 약간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고, 혹시 예수님께서 가족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에서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고, 그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동생 유다는 ‘유다서’까지 기록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들을 외면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족,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서도 말씀을 바르게 듣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지 않거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 가족 공동체’가 됩니다.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다(22-25절)
22-25절은 갈릴리 호수에 이는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갈릴리 호수는 이름이 몇 가지 있습니다. 호수의 모양이 하프(harp)와 닮았다고 해서 게네사렛 호수(the lake of Gennesaret)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디베랴 바다(the Sea of Tiberias)’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도시가 호숫가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호수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은 갈릴리 호수입니다. 그 인근 지역이 갈릴리이기 때문입니다.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잠이 들었다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온종일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깊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압 차로 인해서 광풍이 호수로 불어왔습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셌던지, 바람에 이는 물결이 배에 가득하여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의 제자 중 다수가 전직이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 관한 한 전문가였습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에서 깨셔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가 생겨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해결 받을 수 있겠구나.”와 같이 ‘문제해결 방법’을 일깨워주시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분, 광풍도 순종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신지를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풍랑을 멈추게 하는가를 알게 하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2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더욱더 깊게 넓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 위해서는, 주님 우리의 힘이신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께 돌아온 한센병자처럼 주님께 무릎을 꿇려야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주님께 무릎을 꿇리고,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도 참 부족하고, 형편없음에도 우리를 어두운 세상을 밝힐 등불과 같은 존재로 불러 주시고, 주님의 가족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인생의 등을 밝힌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해 주셨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조건이 있어서 주님의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여겨주셨음을 되새기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바다에 아무리 큰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그 배에 주님이 타고 계심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무릎을 꿇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 등불은 켜서 등경 위에 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등불을 켜 주셨는데, 당신이 지금 삶의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2. 예수님께서는 “내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가족으로서 지금 당신이 듣고 행해야 할 말씀임에도 주저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3. 당신의 인생 바다에서 일었던 풍랑을 주님께서 잠잠하게 해 주신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의 일을 통해서 주님을 얼마나 깊고, 넓게 알게 되었습니까?
4.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무릎을 꿇리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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