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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8:26-39

누가복음 8:26-39
찬송가 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 다음 주 월요일(4월 27일)부터 현장 새벽기도회를 재개합니다. 홍보관 1층으로만 출입할 수 있으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라 참석하시는 분은 마스크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홍보관 1층에 마련된 손 세정제로 손을 씻고, 체온을 측정한 후, 참석자 명부를 작성하신 다음에 홍보관예배실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홍보관예배실에서는 안내에 따라 지정된 좌석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누가복음 8장은 ‘그 후에’(1절) 라는 문구로 예수 사역의 새로운 막이 열렸음을 알립니다. 7장이 죄를 지었던 한 여인이 울며 향유를 부은 행동을 극찬하시면서 죄사함의 선언과 평화를 명하신 예수님 말씀으로 끝났기에(7:36-50), 성경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도 그 여인처럼 믿음 위에서 용기 내어 예수 앞에 나와 눈물로 사랑을 표현하고 거룩한 낭비로 주밖에 소망 없음을 고백하기 원하시는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8장은 ‘하나님 나라’(1절)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안 공동체가 생겼음을 밝히고(1-3절), 그 중심엔 말씀이 있다고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4-15절). 마음에서 말씀이 자라는 사람은 켜진 등불처럼 증거가 나타나는데(16-18절), 이는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19-21절). 사탄은 이를 막기 위해 광풍을 보내고(22-25절), 광인을 만들지만(26-39절), 말씀의 길을 막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옷자락 만지는 것뿐이란 부족한 고백마저 기쁘게 받으셨고(40-48절), 죽음까지도 생명으로 바꾸십니다(49-56절). 말씀의 꿈틀거림으로 지어지고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우리에게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소망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7장의 여인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오늘 본문은 거라사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거라사의 특징은 ‘갈릴리 맞은편’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서편 도시인 막달라에서 동쪽으로 건너가 당시 이방 도시였던 거라사에 도착하십니다. 본문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익숙한 유대 도시에서 광풍이 몰아치는 호수를 건너 이방 땅에 오십니다. 그곳에서 귀신에게 지배당하던 한 사람을 만나고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본 거라사 근방 모든 백성은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했고, 주님께서는 떠나시며 회복된 그 사람을 증인으로 보내셨으며, 그는 온 성내에 예수님이 행하신 큰일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께서 익숙한 하늘 보좌를 떠나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싸움을 이기셨고 승천하시며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고 보내셨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이야기의 압축판입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누가행전(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를 기대하며 본문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27절)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도시 사람’인 동시에 ‘귀신 들린 자’ 였습니다. 먼저 ‘도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8장에서만 해도 성(1절), 동네(4절), 도시(27절), 성내(34절)라고 다양하게 번역되었지만 사실 헬라어 ‘폴리스’라는 한 단어입니다. 인구가 많아서 도시라 부른 것 아닙니다. 당시 도시 인구수는 천차만별이었지만, 요새나 성벽 안에서 오밀조밀하게 살아간다는 사회적 형태가 동일했습니다. 숫자가 아닌 밀도가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란 학자는 「도시의 승리」란 책에서 도시를 ‘지역이나 건물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까이함으로 서로 얽히고 교류하는 장소’라고 정의합니다. 성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고, 안전함을 느끼며, 타인과 교류하며 창조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즐거워했습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미지를 그려보면, 속세를 떠나서 산속에 들어가는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시를 향하셨고, 도시인을 구원하셨으며, 도시로 보내십니다.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19년 6월 24일에 발표한 도시계획현황통계는 우리나라 국토 면적 106,286㎢ 중 도시지역은 17,789㎢로 전체 면적의 약 16.7%에 불과하지만, 주민등록상 총인구 5,182만 명 중 91.8%인 4,759만 명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도 도시에 있는 은행, 병원, 인터넷 서비스 등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도시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 후에 고개를 들면 도시인의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도시로부터 도망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도를 배우고 따름은 도시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가 얽히고 교류하고 있는 이 곳을 복음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귀신 들린 자’ 였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육체나 정신의 질병도 아니고, 장애도 아닌,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초현실적인 문제, 절대로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한계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가 주는 그 많은 혜택이 그를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으며, 집에 머무르지 못한 채, 도시 밖 무덤으로 쓰던 동굴이나 천한 장소에서 인격을 훼손당하고 있었음에도, 도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적 격리’ 뿐이었습니다. 29절은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족쇄(고랑)을 채워 지켰다’고 하는데, 여기서 지켰다는 단어는 ‘휠랏소’이며 정확한 의미는 ‘감시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기 파괴를 막기 위한 명목이기도 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도시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문젯거리를 방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애썼음에도, 쇠사슬을 끊고 호숫가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도시의 한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예수님이 아니면 회복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주님께서 찾아오신 세상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28-33절)

(28-33)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도시로 들어가려는 예수님과 이를 저지하려는 귀신의 싸움을 28절부터 33절까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엎드려 굴복했지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예수의 신성을 불렀지만, 자신과 예수는 아무 상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바뀌길 간절히 구했지만, 끝까지 자기 뜻을 바꾸지 않고 말씀을 막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귀신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름을 묻는 예수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답합니다. 군대라고 번역된 ‘레기온’이라는 단어는 대략 6천 명에 달하는 군인으로 구성된 로마 부대의 명칭입니다. 귀신은 다수였지만, 예수님은 홀로 싸우십니다. 그들은 조직적이었지만, 주님은 오합지졸 같던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함께 나아가셨습니다. 귀신은 경제성을, 예수님은 생명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을 이기기 위해 더 강한 폭력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건네시는 질문과 관용을 통해 세상을 바꾸십니다. 33절의 ‘몰사했다’는 단어 아페프니게는 질식시킨단 뜻으로 7절에서 가시떨기가 자라서 씨앗의 ‘기운을 막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귀신은 말씀이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은 무저갱으로 가라앉기 두려웠음에도, 수많은 돼지 머리를 물 속으로 눌러 질식시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극대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살 수 있다면 돼지를 잃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는 사랑의 판단을 내리시고 사역의 손해를 감수하셨습니다. 전투는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귀신이 승리한 듯 보였지만, 결국 회복된 그 사람이 도시 가운데 침투해 말씀의 씨앗을 던지는 전도를 통해 예수님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두 길 사이를 걸어갈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나눠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생명의 회복과 정결함인지 다수의 번영인지를’, ‘상실인지 소유인지를’, ‘대화와 관용인지 폭력인지를’, ‘소망으로 인내하며 마침내 승리하는 것인지 승리인 듯 위장한 패배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34-39절)

(34-39)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34절부터는 귀신이 떠나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를 마주한 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랫동안 옷을 입지 못하던 사람이 폭풍으로 옷이 물에 젖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초라한 행색의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합니다. 쇠사슬과 족쇄로도 통제할 수 없던 이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의 행보를 주목합니다. 이제 단정하게 옷을 입고 안전한 도시 속 집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예수님은 옷을 말릴 여유도 없이, 간밤의 소란과 무리의 거절에 지쳐 있던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긴 했지만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머리 둘 곳 없었고,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질식해 죽었던 수천 마리의 돼지 사체 가운데로 배를 띄워야 했습니다. 광풍을 뚫고 오셔서 광인의 몰골로 돌아가신 것. 이것이 그가 보았던 메시야 예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큰 일'이라고 합니다(39절).

그는 함께 있기를 간절히 구했으나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예수가 포기했던 길을 걸으며 도시로 들어갑니다. 하고 싶은 일(예수와 같이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해야 하는 일(홀로 남아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합니다. 인생을 치유해 주신 주님 앞에 무릎 꿇은 마음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말씀의 전파자가 됩니다. 귀신도 말했고, 돼지를 치던 자들도 말했고, 크게 두려워하던 백성 모두 말했습니다. 이제 그가 말할 차례입니다. 홀로 도시로 들어가 예수에 대한 말을 예수의 방식으로 전합니다. 예수를 마주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평생 예수로 살아갑니다. 말씀이 움트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미친 바람이 불던 호수처럼 미쳐버린 세상으로 내려오셨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인간성이 훼손되는 폭력의 도시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한 사람이 말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 도시를 다닌 것처럼, 우리도 서 있는 이 도시 곳곳에 복음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다니고 증언하기를 소망하고 결단합니다. 귀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길을 막겠지만, 그럼에도 말씀은 반드시 승리할 것을 신뢰하며 우리 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는 도시 안에 있고, 도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시를 혐오하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2. 예수님의 길과 귀신의 길을 구분하며,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돌아봅시다.
3. 예수님을 놀라워하지만 반가워하진 않던 백성이 아닌지 돌아봅시다.
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적어봅시다.
5. 하고 싶던 일이 아닌 해야만 하는 일을 했던 ‘그 사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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