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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2:49-59

 누가복음 12:49-59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며’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둘째는 시대를 읽는 분별력과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우리가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입니까? 죄인들의 구원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려고 하시는지를 밝힌 구절이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나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죽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본문 49절은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49-50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앞의 구절들과 상반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불’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은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불이 ‘붙었다’는 동사는 부정과거형으로 불이 붙은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활활 붙어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는 ‘이미 붙은 심판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최후 심판의 불까지 다다랐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겠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심판에 다다랐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죄인들의 구원’과는 상반되는 듯하여 좀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심판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심판을 말할 때 징벌적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심판은 주님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징벌이 아니라 구원이자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시간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듯이 하나님의 심판 역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까지 심판의 불은 꺼지지 않고 지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말씀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말씀과 상반되는 말씀이 아닌 셈입니다. 불은 심판이자 구원받을 자를 위한 구원이며 좀 더 확대해석해 보면 구원받을 자를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복음입니다. 불이 붙어 확산되듯이 구원의 말씀이 확산되었다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더 바랄 것이 없으셨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을 다음 구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 받을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10장 38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신을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자신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마시는 잔과 주님께서 받을 세례는 대속물이 되어 죽는 죽음을 뜻합니다. 50절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한 죽음을 앞두고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애타는 마음을 답답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51-53절)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구절 역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평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51절에 화평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안의 대상은 ‘너희’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평안은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반면에 51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화평이 아니라 분쟁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로운 사람에게 분쟁을 야기시키러 오셨겠습니까? 분쟁은 주님의 말씀인 진리를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과의 분쟁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진리를 따르는 사람과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님께서 분쟁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간의 평화를 깨트리고 그들에게 분쟁을 유발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진리에 대한 수용 여부에 따른 분쟁은 가족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집에서 평안은 주님 안에서 진리 되신 주님의 말씀을 한마음으로 따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가정의 복음화가 가정의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온전한 평안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평화를 주시고자 하시는데 복음을 거부함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분별력을 가질 것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54-56절)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주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심판의 불이자 구원의 말씀의 불이 지펴지기를 원하셨지만, 우리가 성경과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경험적으로 알아 기상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왜 이 시대의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답답한 심정으로 토로하셨습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곧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사람이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왜 분별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울 점은 삶의 경험과 지식이 시대 상황에 대한 분별력과 연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분별력 역시 경험과 지식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시대에 대한 바른 분별력은 구원의 말씀의 불이 내 안에 지펴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대한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스팟(Spot)과 이정표로 삼는 사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시대를 읽는 분별력이 없으면 인생에서 방랑자가 되고 구원의 때를 놓치게 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다음은 분별력의 필요성을 주님께서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57-59절)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 자신을 고발할 때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피고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범법자는 아니지만 이 비유에서는 금전적인 일로 고소를 당한 것으로 보아 피고인은 돈을 빌려 갚지 않아 채무이행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채권자는 약속기한이 지나도 돈을 받지 못하니 당연히 돈을 받기 위해 채무자를 법관에게 데려가 재판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재무자는 재판을 받기 전에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분별력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채무이행을 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채권자의 무정함을 원망한다면 그는 사리 분별이 밝지 못한 사람입니다. 재판 전에 돈을 갚든지 아니면 채권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채무연장이 되도록 설득하는 것이 분별력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채무불이행처럼 어려움이 닥칠 때 협상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유에서 채무자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고소인은 불을 가져오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재판장 앞에 서는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분별력 있게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무분별한 사람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로 가기 전, 우리는 그 길 위에 있는 사람에게 화해의 방법을 알리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불을 지피신 주님을 몰라보고 재판장에게 무턱대고 가려고 하는 분별력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사람의 길 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 말씀의 스팟(Spot)과 이정표를 그려나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심판을 시작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심판이 최후 완성될 때까지 저희가 살아가는 곳에서 구원의 말씀의 불이 지펴지도록, 그리고 주님의 답답함이 해소되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분별력 없는 사람의 길 위에 하나님 말씀의 스팟(Spot)과 이정표를 그려, 그들이 그것을 보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안착하도록 인도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3. 심판의 이중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4.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듯이 심판 역시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이 완성될 때까지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 오늘날 이 시대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받으셨던 십자가상의 세례가 가치가 있도록 오늘 하루 힘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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