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22-35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노정에서 만나게 되는 각 성과 마을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으셨습니다. 각 성과 마을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은 그중 한 곳에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의 질문에 이은 예수님의 말씀(22-30)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누가복음은 공관복음 가운데 예수님 사역의 발자취를 가장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가르침을 전하신 성읍들이나 마을들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리적 배경이 아닌 그가 가르치신 내용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와 달리 누가는 한 성읍의 이름만은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장차 그곳에서 벌어질 사건에 수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방 수신자들로 하여금 혹시라도 복잡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지명들의 언급을 삼가고,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사건에 그들의 초점이 모일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성읍 혹은 마을에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질문의 내용은 명확히 기록하되, 질문하는 이의 신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앞서 장소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목적으로 생각됩니다. 질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질문은 그 자체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예수님께 묻는 질문은 개인적이기 마련입니다. 구원의 방법이나, 여부, 나아가 구원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그의 질문은 공동체적이었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 자들을 기준으로 세우고, 그 수가 적은지를 물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그의 질문은 이미 그가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본 절의 후반부는 이어진 예수님의 대답이 그가 아닌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개역개정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어를 생략하고 있지만, 새번역성경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라고 기록하여 주어를 명확히 함). 다시 말해 그는 무리들을 대신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의 위치에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체 없이 대답하셨습니다.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28-30)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진 폐쇄적 구원관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안식하고 있는 곳에 그들은 이를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분노와 후회가 뒤섞인 격한 감정이 폭발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경우였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사람들로 확장하셨습니다. 이 역시 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경우였습니다. 여기서 ‘참여하리니’ 로 번역된 원어의 기본형 ἀνακλινω아나클리노는 본래 ‘기대다’라는 의미로, 당시 비스듬히 기댄 상태에서 식사를 하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반영한 용어입니다. 영어성경(NASB)은 이를 ‘recline’으로 번역하는데, 보다 편안한 자세로 쉴 수 있게 돕는 ‘Recliner: 리클라이너’가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and will recline at the table in the kingdom of God.’).
이스라엘은 그토록 기대하던 참된 안식에 이를 수 없고, 사방에서 몰려들어 신분조차 알 수 없는 이방인들은 그곳에 이르러 참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 충격에 넋이 나갔을지 모를 그들에게 예수님은 집중을 요구하시며,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빗대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로 하여금, 당장 방향을 바꿔 좁은 문으로 향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정점에 달했을 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타났습니다.
헤롯과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31-35)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헤롯(안티파스)의 음모를 전하며, 그곳에서 떠나실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의 의도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당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헤롯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이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향해 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2-33)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 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헤롯을 간교한 동물로 인식되던 여우에 비유했습니다. 권력과 기득권에 아첨하던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살해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갈 것이라는 의지와 더불어, 장차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일, 그 죽음을 넌지시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셨습니다.
(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말하며,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부모 된 마음으로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선지자들과 사자들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보호하고자 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죽이고 돌로 친 사실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이가 누구였는지 똑똑히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선언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분명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선언하되, 동시에 회복에 대한 소망을 전하셨습니다. 한글 성경(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은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다소 우울하게 끝맺지만, 원어성경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로 희망차게 끝맺습니다. 영어성경(NIV, KJV, NASB 등) 역시 이를 반영합니다(특히 NASB는 마지막을 문장을 대문자로 다음과 같이 기록함.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결코 각 성과 마을을 지나쳐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개의치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입으로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그곳에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그 좁은 문을 향한 발걸음에 주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 새벽. 그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를 그냥 지나쳐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좁은 문은 아련히 먼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일상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더불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때, 우리는 필시 힘이신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매일 새벽.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찾아와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사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세상에 오신 예수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삶을 보이셨음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 주님과 더불어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결단하며, 힘이신 주님을 경험하는 한날이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을 만나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입니까?
2. 가장 편안하다고 생각되고, 느껴지는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봅시다.
3. 예루살렘을 향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숙고해 봅시다.
4. 내가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무엇(어떤 것)인지 잠잠히 헤아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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