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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4:1-14

 누가복음 14:1-14
찬송가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1-6절)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과 이 모습을 엿보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가난하더라도 안식일에는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것은 종교적인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즐거운 만찬의 시간에 예수님을 엿보고 있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님 앞에 종교 지도자들 외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종병’은 몸의 조직에 유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는 병을 말하며 이 병에 걸린 환자는 물(액체) 때문에 몸이 붓게 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식사 자리에 초대가 되었는지 본문은 설명하고 있지 않고, 주변에 있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엿보고 있는 모습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엿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6장에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고, 13장에서는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전통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앞서 안식일에 두 사람의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해 분을 내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칠 것인지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속마음을 아시고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 자신들의 가르침과 다르고,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들의 무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잠히 있는 것을 보시고, 수종병 걸린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십니다. 여기서 데려다가 라는 단어는 붙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수종병에 걸린 사람의 손으로 붙잡으시고 병을 고쳐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종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엿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구해내지 않겠느냐? 라고 질
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짐승이나 사람을 건지는 것은 예외 규정이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합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자신들의 계략을 이미 아시는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엿보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하였고, 잔치 분위기여야 하는 식사자리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수종병 걸린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극명하게 대조 됩니다. 수종병에 걸린 사람은 끊임 없는 갈증과 몸에 액체가 쌓이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물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우물에 빠지게 된다면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종병이 든 사람은 몸에 액체가 지속적으로 축적이 되어 치료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냥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수종병 든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수종병 든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보지 않고, 단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끝자리에 앉으라(7-11절)

예수님은 시선을 돌려 식사 자리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7-9)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당시 이스라엘의 식탁은 ‘ㄷ 모양_또는 알파벳 U자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는 중앙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참여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택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비유를 하시며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무턱대고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왔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잔치에 초대 받았을 때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겠습니까?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청한 사람이 와서 올라 앉으라고 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가 높아지면 인정을 받고, 권력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 했을 때 어느 순간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와서 자리를 빼앗기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를 누가 주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각자에게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누가 그 자리를 허락하셨습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우리도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계셔야 할 곳에 내가 앉아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며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한 없이 낮추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는 가르침을 예수님은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높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더욱 낮아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갚을 것이 없는 자에게 베풀라(12-14절)

예수님은 청함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자신을 청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집주인의 역할 중에 하나는 초대한 사람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식사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셔야 했던 분은 예수님지만 집주인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주인은 자신과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 초대하였습니다.

집 주인이 초대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권력과 물질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들이 이와 같은 잔치를 베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형제나 친척,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대접 받은 것을 도로 갚게 될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으므로 그로 인해 초대한 사람이 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초대할 때 집 주인도 자신과 비슷한 생활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더 높은 사람들을 불렀을 것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비슷하기에 반대로 대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상심리로 인한 선행은 옳지 않다고 예수님은 이미 누가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34-35)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예수님의 비유는 자신의 친구나 형제 친척을 초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나라로 갔을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갚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갚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 나라에 초대 받은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섬긴다면 대가를 바라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삶 속에서 하나님을 목적 삼고, 자신의 일터, 삶의 자리에서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섬기며 각자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삶 가운데 예수님이 앉아 계셔야 할 곳을 내가 대신해서 앉아 있는지 돌아봅니다. 권력과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져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마음을 용서하시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대가 없이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지만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동행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수종병’든 사람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왜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 내가 주변에 대가 없이 잔치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묵상해 보고 실천해봅시다.
4. 자기를 낮추는 것이 나의 삶에서 어떤 부분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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