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5:1-10

누가복음 15:1-10
찬송가 277장 ‘양 떼를 떠나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1-7절)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모두 다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찾은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각 단락마다 소제목이 있습니다. 1-7절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이고, 8-10절은 ‘잃은 드라크마(은전)를 찾은 여인 비유’, 그리고 11-32절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입니다. 그런데 왜 잃어버리게 되었는지와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약간씩 다릅니다. ‘잃은 양’은 양이 자기 발로 양 떼와 우리를 빠져나갔기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고, 목자가 양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곳까지 가서 거기서 우리까지 데리고 옵니다. ‘잃은 드라크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여인이나 다른 사람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에 있게 되었고, 여인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장소를 발견했기 때문에 되찾게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신이 잃은 상태가 된 것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이고, 또 자기 발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되찾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되찾는 목자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지만,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와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오늘은 첫 번째 비유와 두 번째 비유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먼저 1-7절이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유대인들은, 특히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헌신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의인을 위하시는 분이었고, 죄인을 위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형벌의 대상이었지, 구원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삶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것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듯이, 내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은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수용하게 되면, 자신들의 신앙관과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람들에게 ‘세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직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세리는 백성들로부터 강압적이면서도 터무니없는 세금으로 자신의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걷은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쳤기 때문에,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고 불리기도 하고, ‘숲속에는 이리가 있고, 거리에는 세리가 있다’라고 취급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남자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사회에서 저버림을 당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의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교정시켜 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양’의 이미지는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近視)이기 때문에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그 무리에게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곧 길을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양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양의 시력으로 분명하게 물체를 구별할 수 있는 거리는 불과 2-3m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시력으로는 어디가 목초지인지, 또 어디가 가시덤불인지를 분간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양에게는 치타와 같은 빠른 발도 없고, 원숭이와 같이 나무를 잘 탈 수도 없고, 하이에나와 같은 치악력도, 사자와 같은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하마나 코끼리처럼 덩치도 크지 않습니다. 양의 머리에는 뿔이 박혀 있기는 하지만 뒤로 감겨 있어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은 고집도 아주 세다고 합니다. 시력도 좋지 않고, 먹이를 구할 능력도 없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고집만 셉니다.
그래서 고대 중동의 사람들에게 양은 환영받는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아주 심한 욕 중의 하나가 ‘양 같은 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고집이 세고,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대해서 예언하며 우리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을 두 부류-자기들과 같이 괜찮은 인간과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상종하지 못할 인간-로 분류했습니다. 즉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인간이 있고, 버리시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우리 안에 있는 양과 잃어버린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 모두가 목자의 보호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가 잃었던 양을 찾고서 취한 행동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목자는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후에 즐거워하며 그 양을 어깨에 메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깨’가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입니다. 양쪽 어깨에 멘 것입니다. 목자는 양이 가장 편안해 할 상태로 메었습니다. 길을 잃은 양에게 목자의 어깨 위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을 것입니다. 이 목자가 양을 찾다가 피곤했을 수도 있고,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화가 치밀어 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목자는 양을 먼저 두드려 패는 일부터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는 자기의 피곤함이나 감정보다도 양이 가졌을 피곤함과 두려움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동안 나를 믿지도 않고, 손가락질했지? 먼저 몇 대 맞고 시작하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 혼자의 힘만으로 사는 것이 힘들었지? 이젠 내가 너를 붙들어 줄게. 네 인생이 마치는 날까지 내가 동행할 거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양을 찾은 목자는 돌아와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사실 목자가 양을 찾기는 했지만 100마리였던 양이 200마리, 300마리로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양의 수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양을 찾느라 시간과 체력을 많이 허비했기 때문에 속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이 이 비유의 신비입니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8-10절)
8-10절은 잃을 드라크마(은전)를 찾은 여인 비유입니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팔레스타인은 낮에는 기온이 아주 높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는 일교차가 아주 큰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가옥은 더위와 추위를 모두 잘 막아주는 형태이어야 했습니다. 특별한 냉난방 시설을 갖출 수 없었던 서민들의 집은 창문이 거의 없는 형태였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집 안과 밖이 통하는 곳은 지름이 18인치(약 45cm)짜리 둥근 창 1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대낮이라고 할지라도 집 안은 아주 어두웠고, 일하려면 반드시 불을 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 바닥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평평한 돌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돌과 돌 사이에는 많은 틈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동전이나 은전, 오지그릇 조각 등이 떨어지곤 했는데,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그런 틈새에서 찾은 동전이나 은전을 확인해서 그 집에 사람이 살았던 연대를 추정하곤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갈대와 마른 풀을 잔뜩 깔아놓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바닥에 조그마한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야 했고, 바닥을 쓸면서 드라크마 은전이 바닥에 부딪혀 소리가 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이 여인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열 정도로 기뻐했다고 증거합니다. 이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고서 이웃까지 불러서, 함께 즐거워했다면, 그 은전은 단지 액면 가치만 가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액면 가치가 전부였다면, 찾았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웃을 부르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식 화폐 표현인데, 로마식으로 바꾸면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둘은 같은 단위를 나타내는데, ‘성인 노동자 하루 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잃은 드라크마가 하찮은 단위의 액수는 아닙니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최소한 우리나라 지폐 50,000원짜리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기쁨은 잃었던 드라크마의 액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남자들이 결혼할 때에 아내가 될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드라크마 10개를 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그것을 받아서 구멍을 뚫어 목걸이로 만들어 달고 다니기도 하고, 머리띠로 머리에 걸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이 선물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주의 깊게 간직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거나, 마음대로 쓴다면 남편은 자기 아내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 은전은 당시 사회적으로도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빚을 많이 져서 집 안에 있는 쓸 만한 물건들을 모두 압류를 당했다고 해도, 채권자가 이것만은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이 돈은 오직 남편이 먼저 죽고 난 뒤 극도의 가난 가운데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 여인에게 10드라크마는 자신을 향한 남편의 사랑과 남편을 향한 자신의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우리가 이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은전을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은전이 숲속에 떨어져 있거나, 강바닥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랍 안과 같은 곳은 아니지만, 집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전이 여인의 손을 떠나면 집 안에 있어도 잃어버린 상태가 되듯이,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으면 예배당 안에 있어도 잃어버린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불을 들었습니다. 그곳이 어두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우리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삶의 실상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반면에 짙은 어둠이 가득한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아도, 주님께 붙들리기만 하면 그 인생은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비유의 결론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한국-독일전에서 손흥민 선수가 마지막에 50m나 되는 거리를 질주하여 골을 넣었습니다. 이전 대회에서 우승한 챔피언이었던 독일은 그 경기에서 패배함으로 80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그 거리를 질주하여 골을 넣을 때, 6,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환호하였습니다. 손 선수가 달릴 때, 국민이 일어서서 환호하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과 같고, 잃어버린 은전과 같은 사람이 찾은 바가 될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으며, 하나님을 목적 삼는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가 찾은 바 된 양과 드라크마가 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찾으시는데, 통로가 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잃은 양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하나님의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잃은 드라크마와 같이 어두운 곳에서, 그곳에서의 삶이 어두운지도 몰랐던 우리를 빛 속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잃은 상태에 있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을 목적 삼는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므로, 오늘 하루와 남은 인생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런 우리의 삶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발견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의인만을 위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죄인을 위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신의 말로 정리해 보십시오.
2. 당신이 잃은 양과 같이 주님의 우리에서 벗어나 있었던 적은 언제였습니까? 어떻게 해서 주님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게 되었습니까?
3. 드라크마는 집 안에 있었지만,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분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립시다.
4. 찾은 바 된 양과 드라크마로 살아가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새벽기도 > 누가복음(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6:1-13  (0) 2022.12.16
눅 15장 11-32절  (0) 2022.12.16
누가복음 14:25-35  (0) 2022.12.16
누가복음 14:1-14  (0) 2022.12.09
누가복음 13:22-35  (0) 2022.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