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장 11-32절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오늘은 어제 살펴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에 이어서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에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 유대인들이 경멸해마지 않는 세리들과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셨고, 그들과 식탁 교제도 나누셨습니다. 당일에도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에게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1).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이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왔을까요? 예수님으로 부터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더 징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호위호식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왔을까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일 예수님에게 온 많은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결단했음을 의미합니다.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쁨에 동조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냐!”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율법을 제일 많이 알고 있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율법의 올무에 빠져 왜곡된 신앙관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11-19) 세상을 갈망하는 둘째 아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1)라고 요구했습니다. 작년 11월 주일설교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이 같은 둘째 아들의 요청은 당시의 관습으로 보자면 패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저주와도 같은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요청한대로 유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은 둘째는 그 길로 집을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돼지를 돌보며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돌보면서 굶주림이라도 면했으면 좋았겠지만, 돼지들이 먹이로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어 굶주리게 됩니다.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우리가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자책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을 원망하며 신세한탄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 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하늘, 즉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극한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즉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만이 하나님 안에서 죄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사람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외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물리적,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경제 활동을 축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취약계층은 말할 것도 없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기존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일은 전무합니다.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도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전무한 일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을 목적 삼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얼마나 둔감했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세상 조류에 휩싸야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은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한 둘째는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합니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다 포기하고 품꾼의 신분으로라도 받아줄 것을 소망하며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회개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얻은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기고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형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를 전혀 몰랐던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형들에 의해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졌을 때입니다. 성경은 구덩이 속에 빠져있던 요셉이 어떤 심리적인 변화를 겪었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 사건 이후 성경은 요셉에 대해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채색옷을 입고 있던 시절의 요셉과 애굽 사람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의 삶은 전혀 달랐습니다. 형들이 막내인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는 것은 그가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그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범사에 형통하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 죽음에 내몰리는 극한의 상황을 거치면서, 하나님과 형들에게 지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목적 삼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20-24)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
회개하며 돌아오는 둘째를 아버지는 환대했습니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 즉 아버지는 둘째가 떠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네 입구를 바라보면서 둘째가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굶주려서 마르고 보잘것없는 형색을 한 그를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서 오고 있는 둘째를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돼지를 돌보면서 역겨운 악취를 풍기고 있는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환대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온 둘째에게 아버지는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김으로 둘째가 여전히 아들의 신분임을 사람들 앞에서 천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아들이 돌아온 기쁨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우리의 형색이 세상 죄의 때에 찌들어 더럽기 그지없을지라도, 세상의 죄에 찌든 악취가 진동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환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24)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환락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물질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며 사는 삶을 주님께서는 ‘죽었다’고 정의하십니다. 환락에 취해, 재물에 취해, 권력에 취해, 성(sex)에 취해 사는 삶이 진짜 사는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런 삶은 죽은 삶이라고 하십니다. 환락, 재물, 권력, 명예, 성에 집착하면 나는 물론 이웃도 죽이게 됩니다.
n번방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삶을 파괴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사건에서 나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동영상을 보지 않았으니까! 회원이 아니니까, 이 사건은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피해 여성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한번이라도 고민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동조자와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는 우리는 늘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죽음이 아닌 생명을 공급해줄 수 있을까?를 말입니다.
(25-30) 밭에 있다가 돌아온 맏아들
예수님께서는 25절 이하 등장한 맏아들의 거울을 통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의 실상이 어떤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맏아들은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이는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 준수 정신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근본인 사랑과 생명을 저버리고 형식 만을 추구하는 종교 행위는 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이 드리는 제사에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밭에서 집에 돌아온 아들은 종을 통해 집을 나간 동생이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형은 집을 나간 둘째가 돌아온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작은 염소 새끼를 잡아서 친구들과 놀게 하지 않았는데, 허랑방탕하게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은 살진 송아지 잡아 환대한다 면서 아버지에게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 장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국 문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수고했다’며 반겨주셨습니다. 모 장로는 상기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제 드디어 천국에 왔구나' 하는 마음에 설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 지금이 식사 시간이라 다들 천국중국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다면서 장로를 데려가서 자장면을 시켜주셨습니다. 처음 맛보는 천국 자장면의 맛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반 쯤 먹고, 옆 자리를 보니 같은 교회에 다녔던 백 집사가 탕수육을 먹고 있었습니다. 장로는 백 집사에게 우리가 천국에서 만나게 되었다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곧 장로인 자기에게는 자장면을 시켜주시고, 집사에게는 탕수육을 시켜주신 예수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장로는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 백 집사는 집사고 저는 장로인데, 왜 집사는 탕수육을 사주시고 장로인 저는 자장면만 시켜주시는 겁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며 모 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 목사, 배달나갔다.”
(31-32)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에게 온 세리와 죄인들을 맞는 자신의 심정을 둘째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24절에 의하면 종들에게 같은 말을 했을 때 종들은 즐거워했는데, 이 말씀을 들은 맏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세리와 죄인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초대장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와 가업을 섬기며 헌신했던 맏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대든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못난 자식이라며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주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자신의 만족을 위한 열심으로 변질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회봉사기관에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봉사 행위가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봉사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될 때, 갈등이 초래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다른 성도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 자신의 섬김을 알아주지 않는다면서 성도들 간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맏아들인가요? 둘째 아들인가요?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는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언제든지 불평불만을 일삼는 맏아들이 될 수 있고, 세상적 삶을 추구하는 둘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의 심정으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며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펼쳐질 것임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의 거울을 통해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며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둘째 아들과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맏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본질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의 힘이시며 주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 오늘 비유는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요?
- 당시 관습으로 둘째 아들의 요청은 타당한 것이었나요?
-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를 가만두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맏아들이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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