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13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들켰지만, 여전히 주인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혜 있다며 칭찬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반갑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르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눈치 보면서 자기 욕망을 누르고 최대한 순종해보려 하는데,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부정직한 사람이 칭찬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런 메시지마저 받아들여야 한다면 하나님이 거짓말과 도둑질을 장려한다는 오해까지 생길 수도 있다며 항변합니다. 실제로 4세기에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는 이 비유를 근거로 예수의 제자들이 거짓말쟁이요 도둑임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하면서, 고귀한 로마인은 이 모든 부패한 영향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부자는 바로 이전 장인 15장 마지막의 탕부와 같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까지의 비유와 본문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1) 먼저 아버지와 부자 모두 재산을 낭비하는 구성원(아들/청지기)을 만납니다. 2) 깨진 신뢰는 서로를 멀어지게 합니다. 3) 또한 그러한 반역적 행동에도 아버지와 부자는 사랑과 인내로 자기 것을 내어주고 포기합니다. 4) 제멋대로 굴던 아랫사람은 결국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5) 두 비유 모두 배신했던 구성원이 결국 아버지와 부자의 자비로움에 인생의 승부수를 던집니다. 6) 은혜에 인생을 걸었던 도전적인 모험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부자로 인해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5장의 아버지는 극찬하면서도 본문의 주인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비난을 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이 15장 보다 더 노골적으로 '돈'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1-2)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의 것을 ‘낭비’하는 청지기. 청지기라는 정체성은 자기 것이 주인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본문은 이를 ‘낭비’라 부릅니다. 우리는 ‘낭비자’입니다.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주님이 주셨는데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느냐고 자문해 본다면, 떳떳하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내 가정, 내 관계, 특별히 내 돈. 내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수년간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낭비자로 살고 있지 않은지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다음으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주인이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다’는 문구의 문자적 의미는 ‘고발이 들어오다’입니다. 만약 주인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 부정직하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면, 사람들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존경받고 있었기에, 그를 위해 누군가 불의한 청지기의 실체를 고발합니다. 부자가 존경받는 선한 사람이었음은 고발에 대처하는 자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고문해서 얼마나 낭비했는지 확실한 정보를 얻은 후 돌려받기 위해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보던 일을 셈하라’고 말하며 장부를 돌려달라고만 합니다.
이집트, 레바논, 이스라엘, 키프로스에서 40여년 동안 머무르며 중동에 대해 연구한 케네스 E. 베일리(Kenneth E. Baily)는 ‘중동의 전통에서는 관리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종이라도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을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그냥 쫓아내는 법이 없는데, 본문의 전개가 가능했던 것은, 주인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청지기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군소리 없이 해고를 받아들인 것은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양심과 성경 말씀이 우리를 하늘 법정에 세우고 ‘낭비자’라고 선언한다면, 그 앞에서 어떤 변명을 내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지금은 들키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현실을 외면해 왔지만 이제는 도망칠 곳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3-7)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청지기는 채무자들을 부릅니다. 기름 100말은 우리나라 단위로 생각한다면 약 126말이며, 올리브나무 약 100그루가 있어야 생산할 수 있었고, 1000데나리온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노동자 평균임금 3년 치 금액이었습니다. 밀 100석을 우리나라 단위로 생각한다면 약 252가마이며, 당시 2500데나리온의 가치, 7년 치 품삯이었습니다. 청지기는 빚진 기름의 50%를, 빚진 밀의 20%를 감해주었습니다. ‘일일이 불러다가’라는 설명은 그가 두 사람의 장부만 조작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얼마나 빚졌느냐’는 질문은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채무관계는 장부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생색내기 위해 부르고, 묻고, 함께 장부를 조작합니다.
이렇게 주인의 것으로 자기 미래를 준비한 것은, 그가 자신을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러운’ 존재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즉각적으로 움직입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멍하니 있지도 않습니다. 분노로 고발자를 찾아다니지도 않습니다. 힘도 없는데 구차한 자존심만 남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영접하리라’는 말은 1세기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작품에 나타나는 관용어로서 일자리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즉각적으로 다른 집 청지기 자리를 구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합니다.
본문의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청지기임을 증명합니다. 그가 모시던 부자는 돈보다 사람들의 ‘마음-사랑과 존경’을 중요히 여겼습니다. 나아가 확신에 미래를 건 모험을 하는 대범함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사람들이 청지기를 신뢰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고용될 될 것입니다. 주인을 정확히 알고, 자기 이익을 위해 궁리하는 지성과 무모할 정도의 계획을 밀어붙이는 실행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오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은 분명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부자에게 돈을 빌렸던 사람들이 일일이 청지기를 만나고 돌아와 잔치를 시작합니다. 곧 온 마을의 축제가 됩니다. 부자의 덕과 자비를 칭송하며 들썩입니다. 만약 주인이 이 과정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장부를 원상태로 돌린다면 차려진 잔칫상을 엎어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채무는 그대로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은 가만히 있으며 청지기가 한 일로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받기로 합니다.
(9-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보 같은 주인입니다. 주인은 굳이 청지기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로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묵묵히 이 상황을 받아냅니다. 저렇게 바보 같은데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바보스러움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낭비자였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도 청지기와 매한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이었던 시간을 주며 생색 냅니다. 이미 주님 것인 돈을 필요한 곳에 전달하면서 자기 미래를 준비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운’ 우리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먹고 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미래를 위해 준비할 생각과 결단을 했기에 ‘지혜롭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인생장부를 하나님에게 전달하고 난 뒤를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지혜이며 따라가야 할 말씀입니다. 본문을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인정하며 따를 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통로와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말씀이 저를 고발합니다. 하늘 법정으로 끌고 올라와 심판대 앞에 던집니다. "너는 낭비자이다." 맞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바로 저였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고 싶었지만, 제 속에서부터는 어떠한 선함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청지기. 품삯을 받은 만큼만 일해도 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교우님에게 받은 사랑과 매달 받는 돈만큼 사역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이 양심과 영혼을 때립니다. 하지만, 본문이 은혜이며 기쁨입니다. 삯꾼만도 못한 제 모습을 다 아시면서도 '지혜롭다'고 칭찬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전히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심방하고 위로하는 사역 가운데 '모두 네 자기만족과 자기보전을 위해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아니냐'는 양심의 고발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 자비로우심에 인생을 걸고, 주어진 것을 주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소망하고 결단합니다.
우리는 낭비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십니다. 아무 변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지만, 아직 인생장부는 주님께 넘어가지 않았고 또 하루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마을에 축제가 시작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렇게 불의한 청지기도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는데, 도대체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일갈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제자도를 걷는 우리가 오늘을 기회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돌리고 축제를 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경외해야 할 말씀, 세워가야 할 말씀으로 여기겠습니다. 여전히 낭비자이고, 아무 변명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을 돕지만 실상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인 비루한 인생이지만, 이마저 묵묵히 지켜보시는 하나님 자비로우심을 힘으로 여기며 다시 나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가 ‘낭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인생장부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을 해왔는지 돌아봅시다.
3. 우리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4.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5. 구체적으로 누구를 돕고 있는지 돌아보며, 결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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