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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1:10-28

누가복음 21:10-28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환난의 징조(10-19절)
누가복음 21:5-38은 고난주간 중 화요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인데,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사람들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던 성전,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지어질 성전의 화려함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0-19절은 환난의 징조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0-11)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1차적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이 민족’과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은 약 40년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지진, 기근, 전염병을 비롯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를 사는 것입니다.

(12-13)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이 말씀은 ‘내(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즉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특히 ‘손을 대다’라는 말은 죄수를 끌고 갈 때 오랏줄로 묶거나 죄수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군인이 옆에서 양팔을 제어할 때에 사용했습니다. 마치 경찰이 현행범을 체포할 때, 미란다 원칙을 말하고 팔에 쇠고랑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될 고난을 직접적이고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라고 무언의 격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누가는 주님을 믿는 것, 믿음 때문에 회당(작은 법정)에 가게 되고, 옥에도 가게 되며, 권력자들에게 끌려가게 될지라도 그것이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증거가’라는 단어 앞에 작은 숫자로 1)이라고 되어있고 아래를 보면, ‘또는 증거의 기회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 주님을 믿는 일 때문에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되면,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주님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겪을 수도 있고, 또한 누려야 할 이익 대신에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밝혀지는 때에 그 모든 일은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14-15)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처방전입니다. 14절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명심하라’ 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 어떤 말로 변론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자신이 잘못 행동하거나 악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를 15절이 말씀하는데, 주님께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시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일깨워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15절에서 가장 강조하는 단어는 ‘내가’입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게 되는 박해와 고난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박해를 당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있는 일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지하 카타콤에서 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나 모슬렘 지역, 공산권 국가 등 특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박해를 받지, 오늘날은 박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박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진리 앞에서 자신을 홀로 세우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척박한 환경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12-15절이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박해라고 한다면 16-19절은 친한 사람들에게 겪는 배신과 박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17)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부모, 형제, 친척, 벗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를 뜻합니다. 이들은 서로 격려하고 품어주며 세워주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고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할 것이며, 결국 몇몇은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발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발등에 난 상처는 그렇게 오래지 않아 아물게 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훨씬 더 오래 갑니다. 마음에 난 어떤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인생에 어려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보호를 뜻하는 격언과도 같습니다. 우리 머리카락 개수는 약 8만-10만 개 정도가 되고, 남자 머리카락의 수명은 4-5년 정도이고, 여자 머리카락의 수명은 6-7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50-100개 정도는 빠지고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하나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카락의 개수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빠지고 새로 나는 것까지 관심을 갖고 계신다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세심하게 지키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에 인내가 필요하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공부하라’일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는 네 마음에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하면 돼.”라고 말한다면, 자녀가 1년 중에 공부하는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든, 운동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아주 잘하려면, 그것을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기 싫을 때도 그 마음을 극복하고 하는 것이 잘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을 한두 번만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드실 때까지 시키십니다. 그것이 인내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푸쉬케(psuche)’입니다. 이 단어는 ‘영혼’이라는 뜻도 있고, ‘생명’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숨을 쉬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숨(생명)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쉰 후에는 영원한 숨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의 환난과 인자의 오심(20-28절)
20-28절은 예루살렘이 당할 환난과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예언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빌라도 총독 이후에 이스라엘에 온 총독들은 실정(失政)을 거듭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급기야 66년경에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AD 67년에 네로 황제는 이스라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장군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강한 저항과 험한 지형 구조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정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해서 굶기는 아사(餓死) 작전을 썼습니다. 베시파시아누스에 이어서 온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70년에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엄청난 일을 겪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난 후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도망가서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강한 로마군에 의해서 대부분 진압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마사다 요새’였습니다. 이것은 헤롯대왕이 염해(사해) 서쪽에 세운 성이었는데 절벽에 3층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피했던 사람들은 3년을 버텼지만, 거기에서 항전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유대인들은 1948년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까지 무려 1,875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전 세계를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이 말씀은 ‘임신을 하는 것과 출산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로마 군인을 통해서 모든 백성에게 동일하게 임합니다. 그래서 그 화를 면하고 싶으면 산으로 도망가고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 중에 한 부류가 임신한 여인들과 젖먹이를 가진 여인들입니다. 빨리 도망을 가야 조금이라도 화를 덜 당할 상황에서 그런 빨리 도망가기 힘든 사람들이 겪게 될 고난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징계의 말씀이 아니라 따뜻한 배려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27)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당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안한 때였습니다. 불과 40년 후에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주님의 재림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환란과 죽음과 같은 단어가 빨리 와 닿지 않다가, 아주 친한 친구나 직장의 연배가 비슷한 동료가 갑자기 죽었다는 부고를 들으면, 종말이라는 말이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엄청난 사건이 다가올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삶의 상황이 우리를 짓누를 때, 또 주위에서 엄청난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날 때,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그런 때에는 절망해야 할 것 같고, 좌절해야 할 것 같고,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언제 ‘주님의 속량-주님의 건져주심’을 경험하셨습니까? 인생이 아주 잘나갈 때였습니까?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가정이 아주 평안할 때였습니까? 더 이상 내 능력과 지혜로는 머리를 들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를 손으로 잡으시고, 얼굴을 들게 하셔서, 당신의 눈과 우리의 눈을 맞추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게 되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를 가장 잘 대비하며 사는 것은 주님 앞에서 ‘홀로와 더불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해 주시는 주님을 힘으로 삼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누구도 예루살렘과 성전의 무너짐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들의 미래를 보시며 안타까워하시고,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번도 힘이 모자라서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거나 멸망 당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음과 우상숭배의 결과로 그런 국난을 맞았음을 압니다.
하나님 우리가 평생 쌓아온 삶의 성과 우리의 인생 성전도 언젠가는 무너질 때가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을 내가 정할 수도 없음을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각자의 삶이라는 성과 인생 성전이 하나님을 외면하다가 함락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다가 무너지는 일도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는 것 같아도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해 주시는 주님 앞에서 ‘홀로와 더불어’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코로나19도 이기고, 우리를 함몰시키려는 것으로부터도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겪은 크고 작은 환난을 인내함으로 영원한 삶을 소망하게 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환난을 겪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 환난을 통해서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3. 주님은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 주님께서 당신의 머리를 들게 해 주셨습니까?
4.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쉴 때가 있음을 잊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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