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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2:54-71

누가복음 22:54-71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베드로, 예수님을 부인하다(54-62절)
오늘 본문 54-62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내용입니다.
(54)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님께서는 캄캄한 밤에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이자 최고의 법정은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이 공회는 70명의 회원과 1명의 최고의원-대제사장- 등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었고, 공정한 집행을 위해서 낮에만 소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하겠다는 분노와 욕망이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는지 멀리서 따라가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랐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설교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 가까이 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와 같이 칼을 휘둘러 사람들의 귀를 잘랐다면 예수님께서 칭찬하셨겠습니까? 사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미천한 갈릴리의 어부일 뿐이고, 상대는 막강한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어었습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55-57)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당시는 지금의 4월 초였습니다. 그 시기의 예루살렘은 낮에는 반소매를 입을 정도로 덥지만, 급격한 일교차로 인해서 밤에는 꽤 쌀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장작불)을 피우며 추위를 물리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 사람들 사이에 슬쩍 끼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종이 다가왔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문을 지키는 여종이었습니다. 그가 지나가다가 무리 중에 있는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빤히 쳐다보며 살폈습니다. ‘주목하다’로 번역된 ‘아테니조(atenizō)’라는 동사는 ‘응시하다’, ‘자세히 쳐다보다 ’입니다. 그리고 ‘주목’이라는 한자어가 ‘물 댈 주(注)’와 ‘눈 목(目)’입니다. 병에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액체를 부을 때 시선을 병 입구로 모아서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혹시 많은 양을 한꺼번에 부으려고 하다가 밖으로 흐르지 않는지, 입구를 잘못 조정해서 흐르지 않는지, 또 이미 가득 찼는데도 계속 붓고 있다가 넘치지 않는지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한 여종이 베드로를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순간 당황한 베드로는 그 말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이 말을 지금의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니 이 여자가? (생사람 잡으려고 하네) 나는 저 사람 몰라.”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능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물론 사람이 이런 보호 본능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또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말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대화 중에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첨가하기도 하고,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반대로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은 여종의 말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판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앞의 여종과 비슷한 말을 했고, 베드로 역시 동일한 말로 부인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베드로를 곤경 속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 번째 부인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소.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말씨와 갈릴리 지방의 말씨는 서로 모음을 말할 때 다른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자음 중에서는 k g, sh와 같은 목소리 글자(후음)를 잘 발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말씨가 다른 베드로가 예수님의 일행이라는 것을 ‘장담’했습니다. ‘장담하다’는 원어의 의미는 ‘자신이 가진 온 힘을 걸고 확신하다’ 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일행인 것을 이처럼 확신했던 것은 단지 베드로의 말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갈릴리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해도 예루살렘에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 패거리라는 것을 장담하는 이유가 이러했습니다.
(요 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그 사람은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그는 베드로를 분명히 알아보았지만, 베드로는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증인의 말이 분명할수록 베드로는 더욱더 강하게 부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에 의하면, 이때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과 자신이 무관한 것처럼 강하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을 부인하고 난 후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불과 몇 시간 전에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주님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칼을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거기까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결단과 결심만으로도 충분히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는 순간에도 그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결심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 결심을 실천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수험생이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준비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시험 준비를 잘하기 위해서는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의 시작이지 결과는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치고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헛된 말을 했는지, 얼마나 허망한 행동을 했는지를 자인(自認)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주님을 부인하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주님은 자기를 보고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처절하게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이 베드로를 새롭게 하는 출발이 되었고, 그 이후 주님과 시선을 맞추는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공회 앞에 서시다(63-71절)
63-71절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당한 수욕과 산헤드린 공회에서 당한 심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이전에는 가야바의 장인이자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지키는 사람들’에서 ‘지키는’의 문자적인 뜻은 ‘강제적으로 붙잡고 있는’ 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때리다’는 ‘매질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가죽을 벗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살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매질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서 때리며 말하기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게?”라고 조롱하며 많은 말로 욕을 했습니다. ‘욕하다’는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는 것을 재미로 했을지라도, 누가는 그것이 하나님께 한 것, 즉 얼마나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인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 장면은 메시아께서 고난 당하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66-68)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날이 밝자마자 정식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공회는 우리나라의 국회와 대법원이 합친 기능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규정상 산헤드린은 밤중에는 재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식적으로 재판하기 위해서 날이 밝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그렇다고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말해도 당신들이 믿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면,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사형을 선고할 것이고, 반대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그동안 민심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고대 중동이나 소아시아 왕들의 의자 중에 벤치와 같이 긴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군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왕은 그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자기 옆에 앉히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왕과 친구로, 왕과 동급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최고의 선물이었고, 신하가 누리는 최고의 특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그 존재와 능력에 있어서 동등한 분이고, 창조주시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70-71)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묻자, 이번엔 예수님께서 “그렇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이고, 양의 새끼도 양이듯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신성모독의 최상급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예수님께서 사형을 선고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은 소돔과 눈을 맞춘 것이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눈을 맞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돌아보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이 새로워졌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제자에서 주님의 통로로 쓰임을 받는 사도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그리고 남은 생애가 주님께 눈을 맞추는 은총의 나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라면 옥에도 가고, 심지어 죽는 자리도 갈 것이라고 말했고,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3년 동안 스승으로 따랐던 예수님께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멀찍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던 것이 그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주님과 눈이 마주침으로 그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수난당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온 인생이 그 주님과 눈을 맞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소금기둥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베드로는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멀찍이 따랐던 적은 언제였습니까?
2. 베드로는 자기를 돌아보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후에, 통곡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주님과 눈이 마주친 때는 언제였습니까?
3.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언제 당신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셨습니까?
4. 세상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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