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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3:1-12

누가복음 23:1-12
찬송가 : 446장 '주 음성 외에는'

빌라도의 재판(1-7절)
1절, 산헤드린 공회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이들은 앞선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신성모독을 범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정치적인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사형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내세운 예수님의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백성을 미혹하고. 둘째,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금했고,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의 종교적인 문제에는 심각하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이를 처벌하더라도 매나 몇 대 맞고 풀려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무리들은 로마가 심각하게 여길 만한 죄목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반란죄! 예수님을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과 무리들의 거짓된 모습들입니다. 이들은 10절에서도 예수님을 힘써 고발하고 있습니다. 명색이 유대 지도자들이면서 출20:16에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합니다. 이들이 고소한 죄목들은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헐뜯고, 거짓으로 죄를 만들어 어떻게든 예수님에게 해가 가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다름 아닌 사단의 모습입니다. 고발 즉 참소는 사단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을 쓰러뜨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참소한 자가 바로 사단이었습니다(욥1:9-11). 또한 믿는 성도들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는 자가 바로 사단입니다(계12:10). 그러므로 남을 무고하게 고발, 참소하는 자는, 사단을 본받은 자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고 있는 셈입니다.

평소에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약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있다면, 우리는 사단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겉모습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삶으로, 철저한 성화를 향해 몸부림 쳐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회가 전혀 건강하고 정직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짓과 같은 죄를 지을 때, 내 마음이 괴롭고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12: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죄 앞에서 싸우는 자세가 피 흘리기까지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엡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이 말씀처럼 내 입술을 회개하여, 남을 해하는 죄의 병기가 아니라, 참된 덕을 세우고, 남을 세워주는 의의 병기로 사용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4-5)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4절에 빌라도는 조사를 해보았지만, 예수님에게 딱히 반란죄라고 할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할 의향을 보이자, 무리들이 거센 반발을 합니다. 이때 빌라도의 입장은 난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석방하면 흥분한 무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스러웠고, 그렇다고 죄가 없는 자를 처벌하자니 그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인 것을 듣게 되는데, 이를 듣자마자, 그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묘수를 생각합니다.

(6-7)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란 것을 알고, 갈릴리를 관할하는 분봉왕 헤롯에게 예수님을 넘겨 이 문제를 벗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분봉왕’은 왕이나 황제의 허락 하에서 한 나라의 일정 지역을 다스리던 군주입니다. 왕보다는 다소 지위가 낮았으나 때론 왕으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 대왕이 죽자, 그의 세 아들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 이 세 사람이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각 구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켈라오는 왕이란 직위를 받았고, 헤롯 안디바와 헤롯 빌립은 분봉왕이란 직위를 받았는데, 이 중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를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입니다. 빌라도의 명령대로 예수님은 헤롯에게 이송되었습니다.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헤롯의 재판(8-12절)
8절을 보니,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했다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 ‘에카레 리안’은 쉽게 말해 ‘오랫동안 열망하던 것이 이루어질 때, 발생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헤롯이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행하셨던 놀라운 이적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왕궁에는 왕들을 기쁘게 해주는 재주꾼들이 있었는데, 소문에는 예수님이 더 신기한 재주와 이적을 행한다고 하여, 그것을 보기 위해 간절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니, 헤롯이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헤롯의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목적을 이미 파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는 표적이었지, 한낱 호기심에 들뜬 왕을 즐겁게 해주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헤롯의 호기심과 관심에 반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헤롯처럼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이 한 명 나옵니다. 바로 19장의 삭개오입니다. 눅19:3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기록합니다. ‘보고자 하되’의 원문은 ‘누군가를 계속해서 집요하게 찾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삭개오도 헤롯 못지않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이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만드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작은 키와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그런 난관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 열망과 결단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군중 앞으로 달려 나갔고,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시며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롯과 삭개오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호기심과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점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의 근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앞선 언급한대로, 자신의 흥미와 쾌락을 만족시켜줄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가 세리여서 당시 사람들의 비난을 벗어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보다 삭개오는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의 마음의 열망을 이미 아셨고, 그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다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의 잘못된 열망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화에 못 이겨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 죄만 짓게 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거창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알고 싶을 때, 그의 말씀을 배우고 싶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려 할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에 기쁘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헤롯처럼 여러 말로 주님께 물어도, 침묵하시거나, 혹은 우리가 반복적인 죄를 짓고 있다면, 주님은 우리 마음에 응답하고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내 만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이익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11-12)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던 헤롯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다시 보내기로 합니다. 12절에 따르면, 헤롯과 빌라도의 관계는 전에는 “원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여러 추측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눅13:1을 근거로 합니다. 갈릴리는 헤롯 관할인데, 빌라도가 헤롯을 무시하고 갈릴리 사람을 마음대로 처형해서, 그로 인한 정치적인 앙금이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원수였던 둘이 “서로 친구”가 되는 계기가 생깁니다. 친구라는 것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것 인데, 예수님의 재판과 그의 신병에 관련한 서신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그들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란 인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소동하여 민란이 일어 날 테고,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여 본국에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의 지도력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로인해 자칫 우리가 폐위될 수도 있다’란 염려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힘을 합하여 이 소동을 잠재우자.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옛말에 ‘친구를 잘 사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친구인가? 혹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인가?’ 일 것입니다. 친구관계는 서로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헤롯과 빌라도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익이 사라지면 다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죄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결국은 서로에게 해를 주게 되며, 패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란? 바로 <댐퍼>와 같은 사람입니다. 댐퍼는 초고층 건축에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건물이 높을수록 바람이 거세져서 많이 흔들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진동 흡수장치인 댐퍼를 통해 바람의 진동을 흡수하여 안정케 하고, 진동으로 움직인 건축물이 제자리를 찾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바람과 지진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를 만나거나 얘기하면, 요동치고 힘들었던 마음이 안정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삶의 문제적인 진동들을 흡수해줘서, 삶의 중심으로 잡아주고 마음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댐퍼와 같은 좋은 친구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친구는 만나거나, 얘기하면, 문제의 요동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 흔들게 만들고 상처를 더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주변인들에게 어떤 친구의 모습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문제를 요동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와 안정을 주고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되는 댐퍼와 같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고 삶의 댐퍼가 되어 주신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요15:14에 주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인간으로서는 서로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가 어렵고, 많은 이들이 힘들어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절대 사람과 물질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근심과 걱정의 요동을 흡수하여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태까지 우리 삶에서 댐퍼의 역할을 해주셨기 때문에,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삶의 중심을 찾고, 여기까지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94:18-19에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댐퍼가 되어주신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우리는 주변사람들에게 댐퍼의 역할을 하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이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의 요동치는 문제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그 근심을 사라지게 하셔서 평안과 기쁨의 삶이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친구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기 도
하나님, 저희가 주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지만, 인생에서 수많은 거짓과 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저희가 철저하게 말씀으로 성화되고 죄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신앙생활도 내 만족과 내 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순전한 열망의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쳐다보지 않고, 인생의 영원한 댐퍼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배우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나도 누군가의 삶의 문제를 감싸 안고 위로하는 댐퍼로서의 좋은 친구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상습적으로 짓는 죄와 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2. 평소 나의 신앙생활은 나의 이익을 위한 마음인지, 아니면 순전한 마음인지 분별해봅시다.
3. 주님을 만나고, 내 삶의 변화된 부분(언행)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4. 삶의 근심과 걱정에 대해 위로 받거나, 힘을 얻게 만들어준 친구(주변인)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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