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24-38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본문의 배경은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수많은 식사 자리를 가졌지만, 이날 만큼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보인 말과 행동들은 그들이 주님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으며, 얼마나 부족한 자들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그들 중 누가 주님을 파는 배신자인가를 가려내기 위해 논쟁하였고, 더 나아가 누가 크냐 다투었습니다.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4-30)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문제는 제자들 사이에 늘 있었던 긴장과 갈등의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46절에서는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와서 변론이 다툼으로 확장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증거합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이 두 형제를 향해 화를 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큰 자리에 앉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뿐더러, 다른 제자들 모두 주님께서 세상의 정치적인 왕이 되셨을 때,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 세속적인 권세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며 다투고 있는 그 곳은 주님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였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그 식사 자리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이 잠시 후 있을 십자가 형벌이었음을 알았다면, 또한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먹었던 떡과 잔을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인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 자리에서 서로 큰 자가 되겠다고 다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고난의 메시야'가 아닌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했으며,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주님 앞에서 세속적인 욕망에 따라 더 큰 자리를 욕심내었습니다.
(25-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보다 부드럽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역설의 진리였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큰 자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의 왕은 권세를 부리며, 백성들에게 은인이라 칭송받기를 좋아하는 권력자입니다. 세속적인 왕에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더 큰 자리, 더 높은 곳, 더 칭송받는 자리를 목표 삼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섬김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헬라어에는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본문에 사용한 단어는 '식사의 시중을 들다'라는 의미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이 단어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사랑의 봉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왜 섬기는 자인지는 주님의 모습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섬기는 자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지금 제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식사 자리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섬김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을 섬기셨을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으며,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몸소 보여주신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섬김의 왕이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각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있을 때,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맡기셨고, 주님께서 희생과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십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처럼 사랑의 섬김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어느 정도 성숙했기 때문도,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도, 이제 변화되어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였고, 서로 누가 큰 자냐 다투었으며, 그들은 잠시 후 주님께서 잡히실 때 모두 도망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 세우신 것은 그들이 주님과 늘 함께 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늘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께서 시련 속에서도 어떻게 묵묵히 순종의 길을 걸으셨는지,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어떻게 죄인을 섬기며 그들을 사랑하셨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주님의 섬김을 직접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가르치셨으며 섬기셨으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직접 보고, 경험한 주님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변화된 삶의 근거가 되고, 섬기는 삶의 이유가 되어, 주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소금기둥과 같았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서로 자신이 높은 자라고 다투는 제자들처럼, 세상의 가치관 속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주님에 대해 무지하여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과 벗어나 있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리와 동행해 주심으로 주님을 깊이 알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주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과 섬김으로 나를 구원하셨는지 더욱 알아가기에 힘쓰십시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더욱 경험하고, 주님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으로 존중할 때,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못해 소금기둥과 같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세상의 소금이 될 것입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4)
(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두 번 부르심으로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의 심각함을 강조하십니다. 농부가 밀에 섞인 겨나 티 같은 것을 날려 보내기 위해 위, 아래로 키질을 하듯 사탄은 주님으로부터 제자들을 멀리 떨어트리기 위해 격렬히 흔들어 댈 것 요청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시험하도록 요청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라는 알맹이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당당하게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오늘 닭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철저히 실패할 것이나, 주님의 기도로 말미암아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갈릴리 바다에서 실패의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가심으로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고, 베드로의 주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신 목적은 베드로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 굳게 될 다른 사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사도들을 굳게 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주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처럼 사탄은 밀 까부르듯 우리의 삶을 뒤흔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으로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느라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잊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어느 순간 주님을 떠올리며,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주님의 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며(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 주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굳건하게 하는 주님의 도구로 또한 사용하십니다.
이제는(35-38)
35-38절의 내용은 공관복음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전과 바뀐 환경에 준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35-36)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시는데,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수 있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제자들은 손님 대접을 받았습니다(9:1-6).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전대(돈주머니)를 준비해야 하며, 배낭(여행용 가방)을 준비해야 하며, 심지어 검이 없는 자는 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호의가 '이제는' 적대감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이사야 53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종과 관련된 말씀이 이제는 예수님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불법자 취급을 받으시고, 백성에게 거부당하고, 조롱당하며, 십자가의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법자 취급을 받으셨기에 이제는 제자들 또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수를 하라는 의미가 아닌, 박해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38) 그들이 여쫘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제자들은 검을 사라는 예수님의 상징적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에게 몇 개의 검이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두 개의 검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검은 사람들이 흔히 지니고 다녔던 작은 검을 말합니다. 어떤 제자는 이 검으로 곧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를 것입니다(22:49-50). 주님께서 '족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개의 검이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중단시키는 의미로서 '그만두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 받으셨다면, 이제는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호의가 아닌 적대적인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롯이 딸들과 사위들에게 하나님께서 성을 멸하실 것이니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으로 존중하며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은 농담처럼 웃음거리로 여김 받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며, 손해를 보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변화된 환경에 온전히 대비하며 헤쳐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 받으신 후에, 즉 고난받으신 후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른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과 섬김의 은총 안에서 섬기는 자로, 돌이키고 형제를 굳게 하는 자로, 고난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제자들처럼 높아지기를 원하며,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사람들과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각오했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가도 사탄이 밀 까부르듯 우리의 삶을 흔들어 댈 때 주님을 모르는 자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가운데 늘 함께하시며 우리를 섬기시는 주님을 이 시간 바라봅니다.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시지 않은 주님의 섬김과 은총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시며, 주님의 섬김을 본받아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따라, 주님의 손을 붙들고 다시 돌이키며 다른 사람을 굳게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기로 날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게 하실 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섬기는 자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이제 어떤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겠습니까?
2. 사탄이 밀 까부르듯 당신의 삶을 뒤흔들었을 때가 있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셨습니까?
3. 주변에 삶이 뒤흔들려 어려워하는 이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굳건하게 하시겠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으로 존중하다가 받는 조롱과 비난 가운데 우리가 품어야 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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