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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눅 23장 26-43절

눅 23장 26-43절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로마 군병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예수님은 매우 지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밤새 모진 채찍질과 갖은 희롱을 당해서 육체적으로 탈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음에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심하게 채찍한 후에 군중들 앞에 세웠습니다(22절). 그리고 이렇게 고문했는데도 “나는 죄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채찍형은 잔인한 형벌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채찍의 끝에는 쇠구슬이나 날카로운 뼛조각이 달려 있어서 때릴 때 마다 죄수의 살점이 찢겨져나갔습니다. 모세 율법에도 40대 이상의 채찍질은 금지될 정도로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는데, 로마 군병의 채찍질은 예수님의 등을 살점이 덜렁덜렁 달려있는 누더기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형선고 후에 예수님을 인계받은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머리에 날카로운 가시면류관을 꽉 눌러 씌우며,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모역했습니다. 모진 채찍질에 의해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상태였는데, 무겁고 거칠기 그지없는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지웠으니 예수님은 힘에 겨워서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26)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로마 군병은 군중 속에 있던 구레네 사람인 시몬으로 붙들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군중 속에 있다가 로마군병에게 붙들려 억지로 십자가를 매야 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입니다. 



구레네는 이집트의 서쪽에 접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영토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은 근동지역과 이집트, 아프리카, 유럽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됩니다. 기원전 3-2세기 프톨레미 시대의 기록을 보면, 구레네 지역에는 약 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오늘 본문은 구레네 사람으로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로 구레네에서 살던 그가 유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지, 구레네 태생으로 예루살렘 주변 시골에 살고 있던 사람인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는지, 이곳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는지 ...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몬이 로마 군병에게 붙들려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무게도 가볍지 않습니다. 사형수가 매달리는 십자가는 다듬지 않은 거친 상태였으니 조금만 잘못 다루면 거친 나무 가시가 사정없이 찔렀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피가 사방에 묻어있습니다. 저주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십자가를 억지로 매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왜 내가 더럽고 무거운 이 십자가를 져야할까? 

* 재수 없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만약 이 사건이 나에게 발생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인생의 여정 속에서 이처럼 황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직장에서 또는 공동체에서 당한 이 같은 일로 인해 억울해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이런 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막 15:21)했는데,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문안할 때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고 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시몬의 집안은 초대 로마교회에서 바울이 신뢰하는 독실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와 바울의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로마 군병에게 재수 없게 붙들려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시몬은 이후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어떻게 회심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그가 한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는 앞서 가는 예수님의 등을 보았습니다. 채찍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등에서 흐르는 피로 인해 예수님이 입은 흉포는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강제로 머리에 씌운 가시면류관으로 인해 예수의 얼굴 역시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에서 살펴보겠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예수님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조롱과 모욕을 하는 무리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사도행전에 의하면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구레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스데반 사건 이후 핍박을 피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한 무리 중 구레네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회심을 한 후, 안디옥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구레네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골고다 십자가 사건은 시몬과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복음을 믿고 주님의 신실한 가정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 시몬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와 그 집안은 신실한 가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더 이상 지고 갈 수 없을 상태가 되었을 때 시몬을 그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구경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로마 군병이 시몬을 지목해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인의 사고입니다. 



난생 처음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나는 물론 온 국민이 전세계 사람들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이 사태에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이 있음을 말입니다. 이 사태를 진정시켜주실 분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관계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좌절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이 역시 우리를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바로 구레네 시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우리 앞에서 걸어가고 계시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걸어가고 계십니다. 아침 안개와도 같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도시의 화려함을 따르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참이요 진리이요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인생으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27-31)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에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따르는 시몬과는 대조적으로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는 백성들과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으로 몰아세운 것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약자인 백성들과 여성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슬퍼했습니다. 



도시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화려함이 있지만 화려함의 뒤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약자들도 존재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도시의 화려함을 추구하면 진리를 보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화려함을 추구하면 화려함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약자들 보지 못합니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가슴을 치며 울면서 예수님을 따라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약자인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헌신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회에 많은 약자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쿠팡 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거 발생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었습니다. 결국 그곳 작업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발생한 인재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취재 보도를 보면서 위생적으로 열악한 환경임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시간제라도 일을 해야만 하는 많은 분들의 애환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낮선 타국에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과 차별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고 있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을 ‘얼마나 알고 있고 무엇을 해주었나?’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28)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께서 지칭하신 ‘예루살렘의 딸들’은 협의적으로는 슬피 울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이지만, 광의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닥칠 환난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30)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보라 날이 이르면’, 이때는 예수님께서 앞서 21:20-28에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환란의 날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다산과 많은 자녀가 축복인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수태하지 못하고 해산하지 못한 여인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과 슬픔을 겪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복이라고 할 정도로 닥쳐올 환난이 얼마나 큰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사람이 차라리 산들에게 자신들 위로 무너져서 생매장 당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호소할 정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자신에게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셨는데, 마른 장작과 같아서 땔감으로 쓰기에 적합한 너희들에게는 얼마나 엄중한 심판이 임하게 될지를 더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했습니다. 성안에서 수만 명이 굶어 죽었고 달아나려 했던 사람들은 로마군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밤새 심한 고초를 당해 십자가를 매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겪어야 할 죽음의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백성들을 더 걱정하고 계십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며,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걱정하시고 위로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두 명의 십자가 사형수 (32-43)



사형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길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 슬피 울며 따르는 여인들 무리 외에도 두 행악자도 있었습니다. 



(32-3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에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사람을 누가는 십자가 사형을 당할 정도로 위중한 범죄를 저지른 행악자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곧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을 받아 마땅한 행악자 취급을 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주님은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 뿐 아니라 속옷을 서로 갖겠다고 제비 뽑고 있는 군병들을 위해 하나님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온 몸이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님에게는 수치심이나 원망보다는 군병들을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관리들과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메시아라고 하는가”라고 비웃으며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다른 두 행악자들의 십자가에 없는 나무패가 걸려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왕”(38),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쓴 글이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팩트(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통해 진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악이 진실을 아무리 부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악을 진실을 공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악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악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의 행악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을 자신과 동일한 행악자로 여기며, 우리는 물론 자신도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못하느냐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반면 다른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나쁜 짓을 했으니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면서, 예수님께 낙원에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으로 먼 미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으로 저 멀리 하늘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시의 화려함을 추구하며 도시의 가치관에 취했던 삶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시키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임을 잊지 마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로 저주의 상징인 더럽고 불결하고 자칫 다칠 수 있는 거친 나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했던 시몬과도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는 상황은 바로 주님의 나를 향하신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약자의 편에 서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나약한 우리를 붙들어주시옵소서. 언제나 약자를 먼저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도시의 화려함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2.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정이 신실한 가정이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슬피 울며 따라오는 무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반응,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 행악자를 향하신 예수님의 반응)

4. 하나님 나라를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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