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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3장 44-56절

 누가복음 23장 44-56절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잠언 14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죽음, 헛된 죽음이 아닌 그 마지막 생명조차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름답게 드려진 의인의 죽음은 땅에 심겨진 한 알의 씨앗과 같이 생명의 역사를 일구어가는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며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심겨지신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숨지시니라(44-49절)
(44-46)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낮에 임한 어둠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변환하여 낮 12시부터 오후3시까지 3시간가량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었음으로 이 사건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을 버리사 어두운 죽음의 터널을 향해 걸어가시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임한 어두움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분노가 어두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둠이 임할 수 없는 시간에 임한 이 어두움은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움을 가져왔고 일종의 두려움까지 들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둠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속에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실제로 그 모든 예수님의 죽으심의 일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47-49)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십자가형을 지켜봤을 백부장이었지만 전례 없는 이 현상들은 예수님이 무죄한 의인임을 깨닫게 하여 주었습니다. 심지어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구경하러 왔던 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자신의 가슴을 치며 돌아갔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과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다 이 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의인임에도 불공정한 재판으로 돌아가시게 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 번째 현상은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진 사건입니다. 당시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길이가 약 15-20m, 폭이 10m, 두께는 10Cm정도 되어서 사람과 짐승의 손을 빌려도 힘으로는 찢을 수 없었으며 자연적으로 찢어지는 일이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휘장도 낮에 임한 어둠처럼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찢으신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까? 히브리서 10장 19-20절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신 이유는 이제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휘장은 단순히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거룩한 곳을 구별하기 위한 휘장에 불과했다면 새 휘장은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정결케 하는 놀라운 휘장이었습니다. 이 새 휘장은 곧 찢겨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전의 휘장과 예수님은 동시에 찢겨졌습니다. 한 휘장은 이제 역할을 다하여 찢겨졌고 한 휘장은 그 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를 정결하게 하고자 찢겨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찢겨지신 휘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고 이제 마지막 숨과 힘을 모아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여기서 부탁이라는 단어는 ‘파라티데미’라는 단어로 ‘맡기다, 의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께 쓸 때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영혼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린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누구도 함께 건널 수 없고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그 때, 내 사랑하는 사람과 재산과 지위와 육신과 모든 것을 떠나 그 나라로 향할 때 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저 물질에서 우연히 생긴 우리는 물질로 돌아갈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맡긴 예수님의 영혼에 거룩한 옷을 지어 부활의 몸을 입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부활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동일한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십시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50-5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바라보던 구경꾼들이 돌아가고 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애통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용감하게 행동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50-54)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그는 사회적, 인격적, 도덕적으로 훌륭한 위치에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원이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원, 고지’를 뜻하는 ‘아리마대’ 지역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2절에 보면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정성껏 세마포로 싸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새 무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던 예루살렘 가까이에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한 재력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한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 ‘당돌히’는 ‘톨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톨마’ 곧 ‘대담함’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감히 ~하다, 용감하다, 담대히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요셉의 행동이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었던 행동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용감하게 그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그가 권력자였기 때문에, 큰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사실, 장례를 치룬 사실은 예루살렘에 파다히 소문이 날게 뻔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공격을 당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며 또 그 여러 사건들을 보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용기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용감한 사람으로 변한 것은 그의 자질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용기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찾아올 불이익과 편견, 공격과 희생 때문에 숨어있는 제자로 살아가곤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길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과 그 나라의 영원한 소망의 빛에 눈이 멀어 이 땅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55절에서 56절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5-5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예수님의 장례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숨어지내던 예수님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이 세마포와 무덤을 제공하였고 예수님을 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준비했으며 조용히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향유와 향품을 예비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줍니다. 지금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잘 따를 것이라는 교만함을 버려야 하며 지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봉사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끝까지 그렇게 신앙생활 할 거라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일을 하다보면 내게 힘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말 필요할 때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함께 동역하게 하시는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때와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조금 열심히 봉사한다고 교만할 필요가 없으며 또 지금 내가 봉사에 열심을 내지 못할 상황이라고 하여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세워 가시며 적절하게 감독이 선수를 기용하여 교체시키듯 필요한 때에 세우실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주님이 일을 맡기실 때 겸손히 최선을 다해 달려가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 곧 도시에 임하신 예수님은 성 밖으로 내쳐져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신들의 바벨탑을 쌓는데 온 힘을 쏟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그 탑을 쌓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모난 돌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고민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내 삶에 모난 돌처럼 여겨져 거추장스럽고 날 힘들게 하고 제한하는 분으로 느껴지신다면 우리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도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신앙의 머릿돌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세상에서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힘없이 매어달려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었던 무능력한 분이십니까? 아니면 말씀 한 마디면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세상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제 숨어 있지 말고 당당히 나가 십자가에 매어달린 예수님을 나의 소중한 세마포로 감싸 안고 새 무덤으로 인도하여 들이십시다. 그때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쫒아낸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낭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오늘도 감격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경험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의 터널을 걸어가실 때 해는 빛을 잃고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그 어둠은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또 찢어진 휘장처럼 아들을 십자가에 찢겨지게 해야 했던 아버지의 슬픔임을 압니다. 이제 그 사랑을 알고 경험한 우리가 더 이상 숨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도시의 가치관을 벗어나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세속적 가치관의 옷을 버리고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사모하며 거룩의 옷을 입고 구별된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묵상해 봅시다.
2.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길 소리쳤던 사람,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큰 어둠이 임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지 묵상해 봅시다.
4.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생애 마지막 날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그 날을 떠올리며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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