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4:36-53

 누가복음 24:36-53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 본문에서 여자들은 예수께서 장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장사된 곳에서 비어진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자들로 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가운데 죽으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분문이 시작됩니다.

나타나신 예수께서 생선을 드심(36-43절)
(36-37)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엠마오에서 급하게 돌아온 두 사람이 제자들 무리와 함께 현재 자기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때 그 죽으셨던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기에, 제자들은 자연스래 그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만일 같은 상황이라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제자들은 마지막날 다시 살아날 것이란 부활을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믿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일반적인 믿음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마르다도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은 마지막날이 아닌 ,지금 여기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서 계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살이 맞닿고 숨결이 오가는 그들 사이에 와 계셨습니다. 본문은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정황이 어떠한지 그러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던 제자들과 거리를 두시거나 구분되지 않으시고, 그들이 모여 있는 그들 사이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멀리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일상의 삶 가운데 오셔서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강이 있으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이 인사는 당시 흔하게 사용된 일상적인 인사였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때에 일상적인 인사로 ‘식사하셨습니까’라고 했던 것과 같이, 그 시대는 평강이 필요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상의 인사로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여기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그 부활에 대한 신앙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미래의 특별한 일을 쫓지 않고, 여기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이런 일들이 자기 만족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들이 됩니다. 만약 현재의 사소한 일상을 가치 없이 여긴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 이후의 일상도 가치있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39-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처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타난 것을 예수님의 영이라 생각했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시고 몸을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육신으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을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 제자들로 부터 구운 생선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선의 가시를 바르셔서 입에 넣고 씹으셨을 것입니다. 생선의 비린내가 예수님의 손과 입에 묻어나고, 생선이 예수님의 입속에서 씹혀서 사라지는 것을 제자들은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선 특유의 맛과 식감을 느끼시며 드셨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제자들 눈에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생하게 살아 먹고 마시는 육신으로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생선 한 토막을 드신 사건은 세상의 페러다임을 뒤집어 놓는 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부활이 아닌, 몸에 부활 곧 물리적인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세상은 한계가 있고 유한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이러한 유한한 세상에 영원을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것향이 있습니다. 영은 거룩하고 육은 천하게 여기거나, 일상은 중요하지 않고 종교적인 것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리되어 있는 영과 육, 일상과 영원,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통일되게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0절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깨닫고 증인이 되게 하심(44-48)
(44-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은 이제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전에 성경에서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말씀을, 제자들에게 다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인데, 이는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구분하는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모세오경(토나)과 성문서(느비임)와 선지서(케투빔)로 나누고, 그 첫 글자를 따서 약칭으로 타나크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은 주전 4세기경부터 집대성되기 시작해, 예수님 당시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까지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몇몇 구절이 암호처럼 자신을 가리키로 있다고 하시지 않고,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성경 전체가 포괄적으로 자신을 가르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4절을 직역하면 ‘이것이 바로 그 말이다’입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그것이다’는 뜻입니다.

손으로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 부위만 알다가, 눈으로 볼 때 그 전체가 코끼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의 구속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제자들이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부활은 믿었지만, 그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제 구약성경이 예수님 자신을 가르킨다는 것을 제자들로 깨닫게 하셔서 증인, 곧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고난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시며 백성을 부르시며 다스리는 것이 구약의 예언된 일들입니다.

제자들을 이로 인해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제자들의 증언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초대교회에 회람되던 많은 문헌들 중에, 신약성경으로 채택된 기준도 이 사도성입니다. 이 사도들의 증언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사도가 아닌 자들의 증언은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들의 증언은 오늘날까지도 법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날도 유효한 증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성경과, 그것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인 신약성경과, 그 역사적 전수자인 교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공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증인들에 의해 증언되고 전수된 성경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하기 전에, 그가 세우신 사도들의 증언인 성경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심이 에덴동산에서부터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부족, 민족, 나라를 거치는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됩니다. 조각별로는 각 부분을 담고 있는 퍼즐이, 전체로 꿰어질 때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되는 것처럼,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완성되는 그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구약성경은, ‘경제학 성경에 길을 묻다’와 같은 제목의 책들과 같이, 경영학, 철학, 윤리학과 같이 여겨질 뿐일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심(49-53)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능력이 입혀져야, 제자들은 증인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원어는 ‘뒤나미스’로 ‘실현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각 사람에게 실현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요엘 2:28에서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드링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 실현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내’가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께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성령을 예수께서 보내시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실제로 각 사람에게 실현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 필요한 역할을 각기 담당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드러나는 명확한 본문이며, 이 본문은 이 삼위의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이루시는 협력의 경륜을 보여줍니다.

마치 재판을 할 때, 법에 따라 심판하는 재판장과 재판을 받는 범법자가 있어야 하고. 재판의 결과를 실행할 집행관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요소가 있어야 공정한 재판이 성사되고 그 재판으로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의 수혜자로서만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공로와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예수님이 범법자가 아닌 의인으로 드러나신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 형벌을 받아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믿는 자에게도 율법이 성취되게 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려지시고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예수께서 계속 이곳에 계시거나, 땅으로 내려가시거나, 보이지 않게 사라지실 수도 있으셨는데, 그러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대기권을 뚫고 지구 밖의 어디로 가시기 위해 하늘로 오르신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문화에서 하나님이 계신 그의 보좌에 오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일부 고대사본에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표현이 없어서 우리 성경에서는 괄호 안에 표기를 했지만, 누가복음과 기록자가 동일한 사도행전에서는 하늘로 올려지심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누가복음을 시작할 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누가복음 1:31-33)라고 했습니다. 이 누가복음 서두에 천사가 한 말이,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하늘에 오르심으로 성취를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 즉 ‘바실레이아’라는 단어가 44번 쓰였습니다. 바실레이아는 통치하다 혹은 다스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왕이 다스리는 군주국가를 가리키는 정치적 용어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예수께서 왕이 되심으로서 누가복음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52-53)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제자들은 왕으로 좌정하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왕이 되셨다는 의미는, 이제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거나 혹은 하나님과 겸하여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자기의 만족을 위해 살거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며 살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까지도 성령을 보내셔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 그를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기에, 그를 영적인 존재로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님은 현재도 육체로 계시며, 우리에겐 성령을 보내셔서 마음의 눈을 여시고 성경을 깨달아 믿게 하심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도시 속에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새 예루살렘 도시의 백성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여야 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서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살길 소망합니다.

기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 주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을 더 쉽게 믿고 그것을 믿음의 영역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아마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 곁에 서서 음식을 받아먹어 보이시면서까지,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께서,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생각해보고, 왜 그러한 방법으로 나타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닫게 한 성경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성경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도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예수님은 왜 하늘로 올라가셨는지 생각해보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4.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부활을 실재 현실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닌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새벽기도 > 누가복음(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24:13-35  (0) 2022.12.21
누가복음 24:1-12  (0) 2022.12.21
누가복음 23장 44-56절  (0) 2022.12.21
눅 23장 26-43절  (0) 2022.12.21
누가복음 23:13-25  (0) 2022.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