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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5: 2-15

갈라디아서 5: 2-15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할례의 무익함(2-6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도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편에서만이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람이 율법을 지켜 얻어낸 공로나 능력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녀삼아주시고 천국백성으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가뜨리려는 세력이 갈라디아 교회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더하여야 구원이 온전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인 즉 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그래서 거기에 인간의 행위 즉, 율법이 더해져야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바울은 크게 분노하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교훈합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를 받는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정신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결단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할례는 그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고 할례를 통해 그 믿음을 외적으로 확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의 표징이 될 뿐이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보라 나 바울이 말한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거친 어조로 할례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할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이며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새로운 생명의 삶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3-4)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의 일부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선동자들은 율법 전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 유독 할례를 포함한 몇몇 가시적인 율법들만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할례처럼 눈에 드러나는 율법들은 강조하면서도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 더 나아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등한시 여겼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이해조차도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이미 받은 자유를 저버리고 율법 안에 갇혀 율법의 멍에를 메겠다는 것은 더하거나 뺄 것없는 주님의 완전한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바울의 경고는 할례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금지하는 교훈만 했을 것입니다. 할례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다만 공로를 얻기 위한 할례를 행함으로써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떠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위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원어의 느낌을 살려서 표현한다면 ‘믿음은 사랑의 삶을 통해 그 효력을 드러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의 반대가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고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다만 그 믿음은 모든 율법 위에 율법인 사랑을 행함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누룩을 제거하라(7-12절)
(7-8)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교회서신을 쓰면서 자주 달리기의 비유를 사용했었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1등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으며 정도를 달리기 위해 온 힘을 쏟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거짓 선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권면한 할례 때문에 갈리디아 교인들은 믿음의 달리기를 멈춰버렸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권면’이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설득’입니다. 즉, 거짓 선동자들이 율법을 더해야 한다는 주장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력있고 화려한 언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에 가짜진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가짜진리에 아무리 반응하고 따라가봤자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9-10)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교회 전체를 잘못된 진리로 물들 수 있었던 데에는 소수의 거짓 선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누룩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큰 반죽을 부풀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약간의 누룩만 있으면 되듯이 소수의 거짓 선동자들이 구원 공동체 전체를 가짜진리로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은 단 하나. 누룩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소수의 거짓 선동자을 출교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는 다시한번 신뢰가 회복되길 원한 반면에 거짓 선동자들에게는 심판의 경고를 보냈습니다.

(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거짓 선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쳤고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할례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할례를 해야한다고 가르쳤다면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외면하게 만드는 최대 걸림돌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요건이라고 할 때는 그토록 환영했던 사람들이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는 다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거짓 선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걸림돌을 은근슬쩍 치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에 대해 조금의 타협도 없이 이 걸림돌을 최전방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비록 자신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 속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가짜진리, 유사복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으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어떤 종교적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사람의 방법과 지혜를 더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경쟁과 우열이 생겨나고 세속적 잣대로 서로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가짜진리, 유사복음이 만들어낸 후유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접할 때 그 진리가 누구에게서 난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록된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믿음의 경주에 힘쓰게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가짜진리는 달음질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믿음의 경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 안과 밖에 존재하는 가짜진리를 제거하는 일에 힘쓰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13-15절)
이제 바울은 율법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할 더 위대한 가치를 증거합니다.
(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은 초지일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은 믿음과 행위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열심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바른 믿음은 바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믿음이 육체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면 이제 그 자유는 주님을 향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이 어찌하여 악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모시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유는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하며 방종의 기회로 삼기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통해 온 율법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말처럼 서로 물고 뜯는 죄의 본성만 가득한 야생동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우리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더 나아가 그 은혜의 감격을 주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어가시길 축복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자유인이자 하나님을 모신 성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 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보혈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주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가끔씩 주님이 주신 자유를 잊은 채 종교적 행위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값으로 측정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지난날을 고백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세상 수많은 가짜진리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사 주안에 참된 자유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성전임을 기억하며 가족과 이웃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와 동행하시고 지켜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그리스도로만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에 제거하지 못한 ‘적은 누룩’(9절)은 무엇입니까?
2.주변에 등장하는 가짜진리들을 분별하고 소거하기 위해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3.분위기와 눈치 때문에 십자가의 걸림돌을 숨기거나 타협한 적이 있습니까? 바울처럼 타협없이 십자가만을 드러내며 살 것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최고의 율법은 사랑입니다. 오늘 내가 행해야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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