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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4:21-5:1

 갈라디아서 4:21-5:1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바울은 계속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1:6). 우리가 계속 보고 있다 시피, 잘못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도 지켜야 하고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6:1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로 박해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어떤 박해를 당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베드로 조차 그 박해를 피하기 위해 외식적으로 행동했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러기에 또한 이 문제는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2:12). 유대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하려고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왜곡된 복음을 자신만 믿을 뿐아니라,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4:17).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가진 자기모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23)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 질문을 통해 드러내려고 합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말은 그들이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21절에서 넓은 의미의 율법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며 모세오경을 의미는데, 유대인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식과 예식을 위한 법조문으로 취급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순은, 율법을 주장하면서 율법의 취지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주장하면서도 율법의 취지를 간과하는 이유는, 율법을 자기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취지를 소홀히 하고, 그 율법을 이용해 자기의를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율법의 바른 의미를 설명합니다.

(22-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창세기 16-21장의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처의 아들까지 총 여덟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고 불리리라고 하셨습니다(롬9:7).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을 출생 방식에 따라 대조합니다. 대조되는 두 아들의 차이점은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이나 성품이 아니라, 그들의 출생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약속을 따라 났으며,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체를 따라 태어 났다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을 첩으로 들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시고, 100세 때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서 났고, 이삭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약속을 따라 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음이 분명한 것은, 사라는 불임이고 이미 늙어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삭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유대이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정체성이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그 근원이 있음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의로움도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종과 자유자(24-27)

(24A)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바울은 이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두 여자는 두 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앞서 3장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셨고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그 언약을 폐기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그 ‘언약’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장 22절에서, 두 종류의 언약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난 언약이며, 하나는 육체를 따라서 난 언약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약속과 육체로는 그 의미가 대립합니다. 육체를 따라서 난 언약은 율법을 의미하며,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율법언약입니다. 약속을 따라서 난 언약은 일한 것과 상관없이 주는 은혜언약입니다.
바울은 두 중류의 언약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24b~25)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첫 번째 언약에 대해서 먼저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름을 먼저 말하지 않고 종을 낳은 자라고 하고, 또한 그 아들을 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어법을 쓰는 이유는 ‘종’이라는 신분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종은 노동력이나 그 쓸모로 가격이 매겨졌습니다. 노동력이나 쓸모가 좋은 종은 비싼 가격으로 매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종은 일을 해야만 값어치가 있으며, 일하지 못하는 종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을 종이라고 하며, 그를 낳은 하갈을 시내산과 예루살렘과 같다고 합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곳으로, 율법이 기원된 곳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현재도 성전에서 의식과 제사가 드려지는 율법의 중심지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이를 통해 하는 말은, 율법과 시내산과 예루살렘은 그 기원이 종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자손을 종노릇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언약 중 하나인 율법언약은 일한 댓가로 보수를 받는, 종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따라서 난 아들은 종과 다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다음 구절에서 설명합니다.

(26-27)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다른,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지로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또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인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관련이 없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달리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율법에서 정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 율법으로 부터도 자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사야 54장 4절의 말씀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사라를 가르킵니다. 출산하지 못한 사라에게 외쳐 노래하라고 한 이유는, 구원이 잉태하지 못하는 사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언약에 따라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하신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즉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4:28-5:1)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삭과 같이 언약을 따라서 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의 방법과 노력으로 육체를 따라서 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고, 불가능한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29-30)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더 노골적으로 이삭과 이스마엘을 대립시키는데,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난 자라고 하고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삭과 같이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라서 났습니다
육체를 따라서난 종과 달리 더 이상 할례와 같은 외적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하갈이 사라를 학대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다 쫓겨난 것과 같이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상황에 영적인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두 상황의 비교로 인해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어 고발합니다.
율법주의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격이 미달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있지만 율법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들를 낳은 하갈이 불임인 사라를 박해했지만, 하갈로 부터는 종이 나고 불임인 사라로 부터는 약속을 따라 자유 있는 아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하고자 한 말입니다.

(31-5: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려고 한 말의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곧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보수를 받는 종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자녀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은 하지만 댓가를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속박되고 종이 되게 하지만, 은혜는 온전히 자유한 자녀가 되게 합니다. 이 자유는 강도의 소굴처럼 자기의 탐욕과 욕심대로 행할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에 마음껏 복음자리를 틀고 오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오늘도 믿음위에 굳건하게 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자유를 누리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자유를 누리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이 되게 하시고, 자유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은 일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없는 종된 세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일하지 않고도 풍성이 누리는 자유가 있는 세상인 것을 소망하며 오늘도 그 은혜에 힘입어 믿음의 삶을 살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비난과 핍박을 피하지 않고 믿음대로 행하는 용기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로 인해 주님께서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거짓된 복음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쳤는지 묵상해봅시다.
2. 율법주의자들의 모순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에게는 그러한 모순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두 여자는 두 언약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두 언약의 차이를 묵상해 봅시다.
4. 나는 비난과 핍박을 피하기 위해 믿음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합리화하는 것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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