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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4:12-20

갈라디아서 4:12-20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믿음의 여정을 앞서 걸어가는 우리들이 믿음의 후손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한편에서는 자신감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간절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에도 바울은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는 말과 함께 권면을 이어갑니다. 이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목적을 아주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 선동자들의 주장에 휩쓸려 바울의 복음을 저버리고 그들을 따라가려는 상황에서 바울은 그들과 맺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자신과 같이 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맺었던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간절함을 담아 편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12-16절)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바울은 앞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많은 책망을 했지만 다시 그들을 ‘형제’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지금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그릇된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며 호소합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선민의식에 둘러싸여 살아갔던 유대인 바울이 이방인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임을 증거하는 행위들, 곧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하지도 않고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바울이 유대인처럼 살거나 할례나 율법을 강조함으로써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삶의 풍습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동일시되어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이방인처럼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으로의 삶이 아닌 이방인으로의 삶을 기꺼이 살았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행했던 것처럼, 율법 없는 자를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행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얻고자 자신도 이방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분적으로 유대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저마다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다름의 간극도 매우 심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목숨이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으며 바울이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시험받는 것이 있었음에도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육체의 약함에 대해서 성경은 정확히 밝히지 않지만, 그가 가진 육체의 약함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업신여기게 하거나 버리게 할만큼 눈에 띄는 질병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위축될수도 있는 질병이었지만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도리어 드러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질병 혹은 육체의 약함이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도리어 바울의 육체의 약함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교인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1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줄만큼 바울을 지극히 섬겼다고 말합니다. 우리말에 ‘몸이 10할이면, 눈이 9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의 소중함을 나태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 그렇게까지 섬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특심은 한 때의 이야기였던 같습니다. 눈을 빼어 줄 수 있을 만큼 섬겼던 바울을 이제는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원수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을 때는 극단적인 희생까지도 감수하려는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태도를 가졌었는데, 이제 그들은 선동자들의 끈질긴 선동에 흔들려 바울이 전해 준 복음에 대한 기쁨과 열정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향한 사랑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바울이나 바울의 설교적인 논리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깨달은 교인들이었다면, 율법주의 선동자들의 선동에도 부화뇌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복음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탁월한 변증가인 바울을 따르는 바울의 추종자들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기 좋은 목회적 신념을 가진 교회를 찾거나 듣기 좋은 설교나 논리적인 설교를 잘 하는 목회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지만, 결국은 한 목회자나 교회를 따르게 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환경에서는 그것이 더욱 쉽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문제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믿음 가운데 믿음의 푯대가 변하지 않는 주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가를 먼저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어떠한 선동자들의 달콤한 선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17-20절)
바울이 이렇게 메시지를 쓴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들이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는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바울은 간절함 때문에 어조가 매우 고조되어 있습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이 ‘언성을 높이려 한다’는 표현에서 바울의 강한 어조와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높아지는 언성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하여 의혹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한글성경에서 ‘의혹’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레오’는 ‘어쩔 줄을 모른다’, ‘당황스럽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의 격앙된 감정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너무 간절해서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교회학교 교사가 되어, 어린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아이들의 믿음이 잘 자라나, 청소년, 청년의 시기를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외발령이나 군대, 유학 등으로 몇 년간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는데, 몇 년 뒤 다시 돌아온 교회에 그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아이들을 통해 그 아이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서 차근차근 복음을 다시 전하고 싶지만 그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 좋았던 추억에 호소해서라도 그를 설득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큰 변화가 없다면,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 그 아이에게 격앙된 표현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이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을 담은 바울의 메시지는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선동하는 율법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접근하여 열심을 냈지만, 그 열심의 동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율법과 관습을 따르도록 이끌었고, 바울과 교인들의 사이를 이간시켰으며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들을 열심히 따르도록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의 동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나 교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릇된 열심에 미혹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바울과 율법주의자들은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가는, 곧 성전된 신앙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그들을 가꿨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강도의 소굴에 필요한 희생양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그들을 선동했습니다.
바울과 율법주의자들의 대조를 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게 권하고, 또한 각자를 성전으로 세워가도록 돕는교회와 목회자를 만나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좋은 교회나 시스템, 혹은 강력한 목회자에게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을 가꿔갈 것을 권면하며, 주님께로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날마다 스스로를 가꿔간다면, 우리들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 그리스도인, 맛을 잃을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의 여정 속에 우리의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속한 가정과 찢어질대로 찢어진 우리 사회에 생명과 회복의 빛으로 비춰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먼저 저희 100주년기념교회가 한 교우님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기꺼이 감래하는 진짜 교회로 계속해서 세워져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모든 교우님들이 진짜 교회에서 신앙생활함을 통해 각자를 성전으로 가꿔가는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저희 각자가 성전으로 세워감으로 인해 저희가 속한 가정과 직장, 사회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온 지구촌이 밝은 세상, 맛있는 세상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갖게 된 동기와 당시의 열정, 그리고 지금 이어가고 있는 신앙의 동기와 지금의 열정을 비교하며 묵상해봅시다.
2. 당신이 누리고 있는 복음의 영광을 동일하게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잠시 기도해봅시다.
3. 지금 당신은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해산하는 고통까지 감래하는 믿음의 열정이 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4.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삶을 살며, 성전된 삶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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