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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4장 1-11절

 갈라디아서 4장 1-11절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첫 전임사역을 시작하면서 10명의 청소년 임원들과 제자훈련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과쯤 진행하면서 구원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10명중에 한 명을 제외하고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사역을 하면서 많은 청소년, 청년들을 만나 심방을 하며 구원상담을 해보았을 때 평균적으로 10명중에 7-8명 정도는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이 요즘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많이들 주십니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복음의 참 의미는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갈라디아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자유의 구원을 다시금 율법주의 아래에서 제한당할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들이 주님께 받은 구원의 자유와 은혜를 다시 한 번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7절)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유업을 이을 자’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든 것을 상속받고 다스려야 하는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되어 참 상속자로 인정을 받기 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곧 3장의 초등교사처럼 아버지가 택한 훈련자 아래에서 상속자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되고 엄격하여 종의 생활과 다름없이 강한 훈련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예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로 변질된 유대교요, 이방인들에게는 각 종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때가 이르기까지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스스로의 힘과 불완전한 우상의 힘을 빌어 구원에 이르려 몸부림 치며 종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시기를 거쳐 드디어 큰 은혜의 때가 임하였습니다.

(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로서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임하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된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함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것이 왜 우리의 속량과 자녀 됨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모든 죄의 유혹을 이기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시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율법의 요구로 인해 발견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지시고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님께, 주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해지며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들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확신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아생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에 주저함이 없으셨기에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 또한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부모에게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고백하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셨고 또한 누가복음 23장 4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거하실 때에도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앞두신 순간까지 한결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담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자녀이기에 또한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때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불순종하다 돌이키기도 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실망시킬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고 그 집의 상속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은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닌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관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론 우리가 실수와 연약함속에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때로는 징계하셔서 혼내실지언정 그 자녀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워 가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그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운데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지 말라(8-11절)

(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고 또한 유대교의 그늘아래에서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뿌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다시 그 율법주의의 그늘아래 거하려 하냐며 그들이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그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단순히 신과 인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선 인격적 관계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까지 깊어졌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자녀의 자리, 상속자의 자리에서 다시금 두려움의 종의 자리로 내려가려 하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율법적으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합니다.

(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인인 것을 깨닫도록 주신 거울 같은 이 율법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거울 뒤로 숨어버렸고 또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참 구원의 사건을 소망하도록 주신 유월절 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오히려 다시 그 유대교의 절기 속에 자신을 가두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골수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쫒지 않고 율법 그 자체로 의로움을 추구했던 삶의 끝이 그리스도의 원수 된 자리였음을 경험했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자리에 서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 속에도 전통을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과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통의 길들을 따라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된 습관의 길만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준 이 간절한 권면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그 자녀로 부르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율법 아래에서 이루신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모든 죄 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사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 주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 신앙생활의 결점을 찾으며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두려움 속에 더욱 견고한 신앙의 공로를 쌓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려는 우리의 구원의 여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 없이 율법주의와 같은 자기 의의 그늘아래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두는 것은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돌아보며 그 은혜에서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내 열심과 감정과 의에 뿌리내려 생명력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시간 다시금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위해 친히 모든 죗값을 치루어 주시고 그 모든 의를 선물로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감히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가운데 복음의 감격을 누리며 그 복음의 자유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형식과 모양만 남은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매일 우리의 삶이 구원의 감격 속에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복된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2. 종과 아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묵상해봅시다.
3.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4. 복음보다 내가 더 의지하는 신앙의 습관과 행위가 없는지 돌아보며 내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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