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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2)다베라/기브롯 핫다아와에서(민 11:1-9)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2)다베라/기브롯 핫다아와에서(민 11:1-9)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로 누군가가 무슨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르쳐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작( ) 삼( )] 정답은 물론 ‘작심삼일(作心 三日)’이지요. 그런데 한 학생이 쓴 답이 ‘작은 삼촌’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작은 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더랍니다. 틀린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작심삼일의 실패를 목격하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시내 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을 것에 대한 기대를 안고 시내 산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주변에서 보낸 시간은 11개월여에 달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 산까지는 3개월 남짓했지만 여기 시내 산 일대에서 거의 일년 가까이를 지체하게 된 것입니다. 신1:6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시내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지 오래니” 그들이 시내 산 일대에서 상당한 오랜 시간을 지체하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다시 민10:11을 보십시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지 두 번째 해 둘째 달-이때가 바로 이스라엘이 시내 산을 떠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전기가 된 유월절 사건을 기점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삼 개월이 경과하여 이 백성들은 시내 산에 도착했고 그리고 그 다음 해 둘째 달에 떠났다고 했으니까 약 11개월을 지체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죄가 그들의 행진을 이렇게 지체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새 결심을 단단히 하고 드디어 시내 광야를 떠나 이제 바란 광야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민10:1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꼭 사흘이 지나간 것입니다. 민10:33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때에--”그리고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는 다베라(3절-불사름) 그리고 기브롯 핫다아와(33절-탐욕의 무덤)에 도착한 것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시내산 동북 55km 지점의 현재의 아인 엘 하드라(Ain el Hadra)지역으로 간주됩니다. 여기 까지가 약 사흘길인 셈입니다.(출애굽 지도 참조) 그런데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시작합니다. 이제 시내 산의 결심은 이 백성에게 다시 작심삼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심삼일의 불평과 원망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일까요? 오늘의 우리는 과연 다를까요? 그러면 우리의 광야 행진에서 오늘 우리가 거듭하는 이 원망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인생의 길을 가면서도 원망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의 건망증, 곧 우리의 망각 때문입니다. 무엇을 망각하기 때문입니까?


1.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모든 은혜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들이 노예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었던 홍해를 도강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목마름의 고통에 시달릴때 마실수 없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고 단물이 되게 하신 일, 르비딤 반석을 쳐서 갈한 목을 축이시게 한 일-다 그의 은혜가 아니었습니까?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듯 여기 까지 오게 한 것-은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불평하고 있습니다. 11: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우리가 원망의 언어를 쏟고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일을 매우 심각한 악(악한 말-1절)으로 간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불을 일으켜 진영 끝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다베라’ 곧 불사름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영 끝이었을까요? 아마 그날의 원망은 진영 끝에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된 때문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공동체의 행진에서 끝에 위치한 사람들은 헌신 자들이나 일꾼들이 아닌 구경꾼의 자세를 가진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일꾼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구경꾼들이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할일은 무엇입니까? 구경꾼의 자세를 청산하고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은혜를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시는 일입니다.


2. 현재의 축복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4-9절 까지는 엄격하게 말하면 다베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으로 보여집니다. 먹을 것을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메뉴가 바뀌지 않는다고 이제는 만나만 만날 먹는 것이 지겨워졌다는 것입니다. 9절은 분명하게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고 증거합니다. 광야의 만나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축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못한 것입니다. 현존의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는 깨달음이 실종된 것입니다. 5-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리 광야에서 음식을 대할 수 없었을 때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내리는 만나는 기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히브리어로 ‘만후’(저것이 뭐냐?)고 외치다가 그 이름은 ‘만후’ 곧 ‘만나’라고 칭한 것입니다. 처음 그들은 만나의 맛을 ‘꿀과자’(출16:31)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 8절에서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하다가 후일 ‘하찮은 음식/박한 식물’(민21:5)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축복에 익숙해 지다보면 더 이상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이 장애인의 날이었고 우리 교회 여러 성도들이 장애 체험 행사에 참여하셨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새삼스럽게 내가 건강한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건강한 두발로 대지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장애인들입니다.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한가지의 결격 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믿음을 갖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광야에 아직도 만나는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에게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3. 미래의 약속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이 광야에서 특히 불평과 원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지금 지나는 이 바란 광야가 크고 적막한 아무것도 없는 광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1:19이 묘사하는 이 광야의 특성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그 광야가 바로 바란 광야이었던 것입니다. 신8:15도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바란 광야의 묘사로 이해합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광야를 지나야 그들은 비로소 약속의 땅으로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는 이제 이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자 하는 주의 놀라운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약속을 망각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가나안’을 거꾸로 ‘안나가’로 읽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행진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는 일입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is yet to come) 20대초의 저의 인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책방에서 우연히 접어든 책 한권이 제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리챠드 바크가 쓴 ‘조나단 리빙스톤 시걸’/ ‘갈매기의 꿈’이었습니다.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동료 갈매기들이 먹이 찾기에만 열중하고 있었을때 그는 높이 나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높이 날면 멀리 새로운 세상을 볼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추방당하지만 그는 그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의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때이어서 저에게 이 갈매기 조나단의 이야기는 제가 그리스도안에서 보아야 할 미래를 암시해 주는 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적당한 직장을 구하여 안정하는 길과 미국 유학을 통해 믿음의 길을 떠나는 두개의 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마침 신문에 광나루 워커힐 호텔에서 영어를 하는 직원을 뽑고 있어서 원서를 제출한 터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매기의 꿈을 읽고 저는 응시를 포기하고 유학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은 주께 맡기고 일단 비상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신학 공부를 위해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NW Airline비행기 좌석에 올라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저는 저의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저의 경제적 고통속에 있는 저의 가족들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내 미래를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제부터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비행 연습을 하겠습니다. 주께서 저를 훈련시켜 주시고 주님의 때에 주님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주님의 때에 저를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저는 이 곳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모두를 향한 미래의 약속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을 따라 비상할 준비가 되어 계시다면 이제 원망이나 불평일랑 푸른 창공으로 던져 버리십시오.


어제 10일간의 우주 탐사를 마친 한국 역사상 첫 우주인 이소연 자매가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광주 성지 교회 이길수 안수집사와 정금순 권사의 1남 2녀중 장녀로 어려서부터 기도안에서 자라온 믿음의 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정 금순 권사는 특히 딸 소연이가 “하늘을 나르는 인물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매일처럼 딸과 QT를 나누었고 이 소연 자매는 늘 어머니와 고향 교회에 기도 제목을 전해 왔다고 합니다. 소연 자매는 한국을 떠나기전 지구로 귀환하고 귀국하면 제일 먼저 고향 교회에 와서 간증을 나누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내일을 향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준비된 선물입니다. 자, 과거에 은혜를 주신 주님, 현재 내 인생의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고 계신 주님,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붙들고 살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시라면 왜 원망하십니까? 왜, 불평하십니까?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 문제로 누군가가 무슨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르쳐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문제를 냈다고 합니다. [작( ) 삼( )] 정답은 물론 ‘작심삼일(作心 三日)’이지요. 그런데 한 학생이 쓴 답이 ‘작은 삼촌’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작은 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더랍니다. 틀린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작심삼일의 실패를 목격하게 됩니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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