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20)여리고에서(수 6:1-11)
‘산 넘어 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어떤 분은 체념을 생각하고, 어떤 분은 새로운 도전 의식을 가지시기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 위한 최후 최대의 시련은 ‘요단강 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리더인 여호수아의 인도함을 따라 제사장을 앞세우고 언약궤를 바라보고 요단강에 그들의 발을 잠그는 순간 요단강은 갈라지고 이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이라는 곳에 진을 치면서 요단강에서 가져온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념비를 세운 이유를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4:21,22)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이 약속된 땅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약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일련의 정복 전쟁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길갈을 지나 약속의 땅에서 첫 번째로 직면한 성읍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지도) 그리고 그 성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산 넘어 산’이 아니었겠습니까?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을 때 이 땅은 번영의 새 시대가 도래 한 것을 알리는 만세삼창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민족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한 엄청난 과제를 안겨다 준 출발에 불과했고,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잠시의 해방의 기쁨을 뒤로 하고 역사적 갈등의 현실을 힘겹게 직면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소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고 우리가 자랑하던 금수강산은 초토화되고 남북 분열이 고착화된 것은 정말이지 ‘산 넘어 산’의 현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때 우리 민족은 이 ‘산 넘어 산’의 현실 앞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초토화된 강산을 바라보며 이 땅을 다시 가꾸는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이 때 이 도전 의식에 불을 지른 노래 하나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 모두에게 번져간 이 노래는 놀랍게도 찬송가(371장)였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본래 이 노래는 남궁억 선생이 1907년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고 일본의 침략의 마수 앞에 무기력을 느끼며 좌절하던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작시한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1937년 3월 일본 총독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영구 금지령을 내립니다. 물론 이 찬송은 해방 후 다시 불리워지기 시작했지만, 6.25전쟁이 끝난 후 초토화된 이 땅의 재건의 과제를 바라보던 시점에서 다시 거국적으로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 오늘의 한국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오늘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소위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인이 전 세계 열방으로 흩어져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금수강산을 한반도로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한다면 이 찬송의 후렴은 이제 이렇게 바꾸어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일하러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위해)‘온세상 열방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모든 나라로’ 일하러가세 일하러가” 이것이 바로 선교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요단강을 방금 지나온 우리의 작은 힘으로 가능할 까요? 그 대답을 위해 우리는 여리고의 성벽을 무너뜨린 그 시대 이스라엘의 행진의 비밀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 행진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1. 믿음의 행진입니다.
무엇을 믿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것을 여호수아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이제 믿음으로 함께 여리고 성을 돌았던 것입니다. 히11:30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이 그 성을 자신들에게 맡기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근거는 항상 언약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맹목적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니라”는 그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없는 이유, 바로 이 영원불변의 약속의 말씀 때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 이번 여름 단기 선교를 떠나는 여러분도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시절 우리는 나라를 잃고 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 특히 믿음의 선배들은 그 회복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그 암담한 현실에서도 믿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금수강산이라”고. 다시 남궁억 선생의 이 찬송시를 음미해 보십시오. “삼천리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누가 주신 동산이라고요?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내선 일체를 추구하며 한국인의 완벽한 일본화를 추구하던 일본의 당국자들이 이 찬송가를 싫어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 찬송가는 금지되었지만 우리의 선배들은 몰래 비밀한 장소에서 숨죽여 가며 “삼천리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넓은 금수강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 온 세상’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신 온 세상의 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단을 건너기 전 두려워하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이 말씀을 19세기의 제국주의 선교의식으로 이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온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찬양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하는 아름다운 땅이 되기를 갈망하는 믿음으로 우리가 나아가는 그 땅을 ‘축복하기 위해’(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밟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단기선교를 통해 수행하는 ‘땅 밟기’의 정신입니다.
2. 순종의 행진입니다.
그래도 우리 중에는 그런 위험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선교를 꼭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년에 바로 이웃 교회가 아프간 사건을 겪으면서 얼마나 우리 모두가 함께 몸살을 앓고 힘들어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질문이 믿지 않는 분들이 제기한 질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게 질문하시면 안됩니다. 그 질문은 마치 전쟁에서 부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꼭 전쟁을 수행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사령관의 명을 거역할 권리가 없습니다.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의 선배들이 신사 참배를 거절한 이유, 그리고 애국 독립운동을 중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여리고 정복을 위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명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입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일을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또 7절을 읽겠습니다. “또 백성에게 이르시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아니 이 성을 돈다고 성이 무너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합니까? 단순합니다. 주님의 명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제 시대에도 찬송가를 부르지 말라고 명을 받고도 계속 찬송한 이유-더 높으신 주께서 우리에게 찬송함으로 주께 나아오라고 명하신 까닭입니다. 아프간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년 여름에도 변함없이 우리가 선교지로 나아가는 이유-“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고 주께서 명하신 까닭입니다. 물론 우리는 작년 아프간 사태를 거울삼아 보다 지혜롭게 선교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6.25전쟁이후 그 초토화된 민족의 땅을 바라보며 찬송을 부르던 그 심정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무슨 명령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정신으로 새마을 운동을 하고 민족 복음화 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 선교의 명령을 순종해야 할 과제 앞에 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되게 하신 이유, 우리끼리만 즐거워하고 기뻐하려 함이 아니라,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열방 가운데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순종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름철 우리의 발걸음, 우리의 행진은 순종의 행진이어야 합니다. 그냥 여름철을 휴가로만 보내지 마십시오. 이 여름철을 선교 여행 아니 순종의 여행으로 떠나십시오. 거룩한 여행을 떠나십시오.
3. 침묵의 행진입니다.
여기 여리고를 돌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께서 명하신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침묵의 행진을 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들만은 앞에 서서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에게는 침묵을 명하셨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의 하나는 인생의 부정적인 언어의 영향을 견제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언론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면 그중의 몇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가 돌았다고 이렇게 매일 성만 돌고만 있느냐”고, “나발만 불면 다냐”고 말하고 싶어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의 말은 동조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을 명하신 까닭에 그들은 말없이 불평을 안으로 새기고 기도하며 성을 침묵으로 돌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때에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진의 시간을 침묵으로 보내라고 명하십니다. 침묵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침묵은 집중하게 합니다. 침묵은 기도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께서 우리에게 침묵을 명하셨을 것입니다.
이번 여름 단기 선교를 떠나시는 분들이 되도록 많은 시간을 침묵하고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소위 선포기도는 결정적인 시간에만 하시면 됩니다. 선포 기도를 남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많은 말보다 침묵을 명하신 이유는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우리의 선포나 우리의 땅 밟기에 달린 것이 아닌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있음을 경험하라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주께서 직접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말로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오히려 경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믿고 순종하고 침묵하고 성을 돌았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엿새간의 침묵 후 마지막 날 마지막 행진 후 순종의 함성과 함께 성은 무너졌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아마 그때 백성들의 외침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창조 과학 협회에서 조사한 고고학 자료(Dr.Bryant Wood)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 성은 이중벽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외벽과 내벽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라합도 거기에 살았을 것입니다. 외벽은 기초벽이 5m 그위에 8m 그리고 두께가 약 2m가 된 것으로 조사되었고,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14m의 높이에 다시 두께가 4m나 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내벽 안에 주거 공간은 약 6-9에이커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단한 벽이 어떻게 무너졌을까요?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밖에서 안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밖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었다는 증거) ‘안에서 밖으로’ 무너진 것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6:20-무너져 내린지라) 그러니까 지진 같은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외벽의 한 부분만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이곳이 라합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할렐루야! 결론은 명확합니다. 그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이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번 여름 우리가 참으로 믿고 참으로 순종하며 기도로 나아간다면 동일한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열릴 것이고 복음의 능력이 우리가 밟는 모든 땅에 넘쳐 날 것입니다. 그 승리를 안고 돌아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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