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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9)요단강에서(수 3:1-6)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9)요단강에서(수 3:1-6)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영화는 본래 ABC TV에서 한 흑인 비즈니스 맨의 인생을 다큐로 내 보낸 것이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자 이것을 다시 본격적인 영화로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Chris Gardner)의 이야기는 계부의 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가는데서 시작됩니다.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가드너가 8살이 되던 해에 계부가 있던 집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결국 가드너는 남의 집에 입양되어 어린 시절을 살아갑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정 폭력, 알콜 중독, 아동 학대등의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세일즈 맨으로 청년 시절 새 인생을 향한 몸부림을 해보지만 생활고로 어느 날 세금도 못 내고 자동차 마져 압류 당하자 전세 집에서 쫓겨 나가 거리로 내몰리고 그의 아내는 아들을 아빠 곁에 놓아 둔 채 떠나 버립니다. 졸지에 싱글 대디가 된 것이지요.(한국에 싱글 대디가 24만가구롤 돌파) 1980년대의 을씨년스런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때로는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때로는 노숙자 쉼터에서 처절한 생존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어머니의 유일한 유산인 기도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고,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 한 그는 인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 하나로 버티었다고 후일 고백합니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어느 날 그는 주식 중개인을 만나 인턴이 되고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 회사를 설립하고 1억 8천만 달러의 윌가의 신화적 사업가가 됩니다. 그는 시련의 강을 건너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온갖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시련의 장애물이었던 요단강 앞에 서게 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지도와 사진)오늘 날 우리가 요단강을 방문해 보면 아주 폭이 좁은 샛강처럼 보이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는 달랐습니다. 특히 우기나 곡식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이면 강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고 합니다. 3:15의 기록을 보십시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계절 그들은 남녀 노소의 거대한 집단으로서 이 강을 건너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광야 여정의 최후 최대의 시련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자, 이런 시련의 강을 그들은 어떻게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인생 광야의 여정에서 우리도 이런 시련의 강을 건너가는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인생 시련의 강을 건너가는 그 해법은 무엇일까요?


1.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기 ‘싯딤’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느보산에서 북서쪽 마을 요단 동편 마을로 이곳에서 직선으로 서편으로 가면 가나안 땅 첫 도시인 여리고에 도달하게 됩니다. 본래 싯딤은 아까시아 조각목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이 곳에 이런 조각목들이 많이 있어 이 마을이 싯딤(지도 참조)이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본래 원명은 ''''''''''''''''아벨 싯딤''''''''''''''''(Abelshittim)입니다. 이 곳 싯딤에서 머물다가 요단을 건너가기 위해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이 백성의 리더는 더 이상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해 탁월한 지도자는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모든 백성들을 기상시켜 요단 도하를 준비시켰습니다. 그의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날 믿음에 대해 존재하는 가장 큰 오해가 있다면 믿음을 아무 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의 장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행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포기할 수 없는 최선의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다시 크리스 가드너의 <행복을 찾아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는 아버지 가드너가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도 너에게 ‘넌 할 수 없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게 내 말(아비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알았니? 네게 꿈이 있다면 넌 무엇보다 그 꿈을 지켜내야 한다” 히11:1의 말씀이 그것이 아니었나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렇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약속의 땅의 꿈, 그 꿈을 이스라엘은 믿었고 그 꿈을 위해 그들은 비록 요단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어도 이 강을 건너야만 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믿음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성결함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단 도하를 위한 준비의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아주 특별한 요구를 백성들에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요단 도하를 위한 기술적인 준비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실까요?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일이 기적이 요구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여기 5절에서 그는 내일 우리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여기 성결이 요단 강 도하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이 없이는 성결의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그릇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릇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럽혀진 그릇만은 그대로 쓰실 수가 없으십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 후서 2장에서 특별히 인정받는 일군의 준비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먼저 딤후2:16을 보실까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리고 이 문맥에 이어지는 딤후 2:21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망령되고 불경건한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성결의 수업준비는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선택 과목이 아닌 필수 과목이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주 고백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결은 행복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Holiness is better than happiness) 최근에 이 명박 대통령은 국정 초기의 자신의 실수가 지도자들의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은 지도자를 인선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나마 대통령께서 이것을 인지하신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통령 자신을 위시해서 우리는 곧 다시 세워 질 이 땅의 지도자들이 성결한 리더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들을 합당하게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오늘의 국가 시련의 요단강을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도덕성 이상으로 더 중요하게 강조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라보고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도대체 언약궤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언약궤는 구약에서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인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보고 행진한다는 것은 내 계획, 내 의지대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시선이 항상 주님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이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지금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과 그들을 따르는 제사장의 사이를 이천 규빗으로 하라는 것은 상당한 거리(900m이상)를 두고 뒤 따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명령하셨을까요? 언약궤와 백성들의 사이가 가까우면 그 많은 무리가 엉켜서 행진할 때 언약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저 뒤에서 가면 앞서 가는 언약궤가 어렴풋이지만 모든 백성들이 언약궤를 보면서 행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신념으로만 갈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념의 근거는 자기의 의지, 자기의 결단이지만, 신앙의 근거와 대상은 내가 아닌 하나님인 것입니다. 자기 신념으로 사는 사람은 신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념으로 요단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그분, 전지하신 그분,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한국 시인중에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김기림이라는 시인이 쓴 <바다와 나비>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다’는 시인의 현실이고 ‘나비’는 꿈꾸는 주인공을 그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삼월 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 시의 첫 연은 꿈의 미래 세계를 향한 시인의 도전의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다의 수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의 둘째 연(문단)에서 드디어 그 수심을 경험한 현실의 좌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시인이 식민지 시대의 시련을 넘어보고자 일본 유학을 떠나지만 그것이 해답이 아님을 체험하고 돌아오는 절망을 반영하고 있는 시였다고 합니다. 현실의 바다, 풍랑이 극심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신념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이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시겠습니까?


행복을 찾아 나섰던 크리스 가드너에게 필요했던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영화는 대중성을 고려해서 기독교 신앙의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았지만 가드너는 한 크리스챤 기자에게 “당신이 현실의 좌절의 벽을 뛰어넘어 행복을 찾기 위해서 얼마큼이나 하나님이 필요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제가 노숙자의 삶을 살 때나 CEO의 삶을 살 때나 항상 저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하나님이 주실 꿈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는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가드너가 노숙자 시절 그를 지켜보았던 한 친구는 이런 증언을 남깁니다. “나는 1980년 노숙자의 숲 키친에서 줄을 서있는 그를 처음 보았다. 크리스는 많은 사람 중에 제일 눈에 띄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난 그가 무엇인가를 해낼 사람으로 보였다. 아기를 안고 기도하는 그는 꿈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난 그의 하나님이 그를 도우실 것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십시다. 다시 기도를 시작하십시다. 그리고 그 크리스 가드너의 하나님, 아니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늘 우리도 우리의 요단을 건너가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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