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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8)느보산에서(신 34:1-8)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8)느보산에서(신 34:1-8)

 

1963년 11월 22일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도심에서 저 유명한 존 F.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자의 탄환을 맞고 죽어갈 때 거의 같은 시각에 또 한 사람이 영국 런던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케네디의 죽음으로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요 변증가요 나르니아 연대기의 작가인 옥스포드 교수 C.S. 루이스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 3년 전에 그의 나이 50대 말에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던 아내의 죽음으로 그녀와 먼저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한 했었습니다. 영국인 루이스가 미국 여인 조이 그래샴을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이미 악성 골수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루이스 교수는 그녀의 병을 알고도 정식으로 결혼 프로포즈를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고통스런 시한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58세에 결혼하여 4년간의 부부 생활을 통한 사랑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45세였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루이스 교수는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는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루이스 교수는 “죽음의 사별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바로 우리가 누려온 행복의 일부분이다”는 유명한 고백을 남깁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느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가 그 백성을 약속의 땅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느보산까지 인도한 후 임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땅을 단(이스라엘 최 북단)까지 보이시고” 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이 보이는 이 지점 느보산까지 도달한 것입니다.(성경 지도) 느보산(시야가 산)은 모압땅 아바림 산맥중 최고로 높은 해발 835m에 위치한 산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를 ‘비스가’(히브리 말로 ‘꼭대기’라는 뜻)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기원후 4세기부터 이곳에는 모세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여러번 파괴되었지만 1932년에 복원된 프란치스칸 교회가 지금도 이 곳에서 성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순례사진) 이 교회 마당에는 모세가 전한 복음을 상징하는 놋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이 교회 마당에서 날이 맑은 날이면 한 눈에 가나안 땅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리더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백성들과 죽음으로 작별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지도자 모세의 죽음을 통해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고자 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죽음은 삶의 영욕을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누구도 완전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나의 인생에도 ‘성공과 실패’, ‘영광과 치욕’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치명적 약점의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한 가지를 잘 하면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또 반대로 한 가지를 잘 못하면 마치 모든 것을 잘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평가하려는 흑백 논리적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할 때는 거의 신화적 수준으로 칭송하다가 뭘 하나 잘못하면 그 순간 죽어 마땅한 인생으로 매장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땅에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은 잘하고 어떤 것은 잘못할 수 있는, 어떤 때는 잘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잘 못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잘 할 때 오히려 우리의 이웃들을 조심하도록 경고해주고, 잘 못할 때 오히려 그를 북돋아 주는 격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흠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순간이 바로 이런 그의 인생을 결산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백성을 약속의 땅이 보이는 지점까지 인도했지만 그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참,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한때 한 순간의 결정적인 혈기,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때린 그 실수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백성을 거기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백성의 리더로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의 믿음의 영광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의 믿음을 결산하면서 더 이상 모세의 이런 실수를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그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한 것만을 기록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실수의 가능성에 긴장하고 살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의 순간 우리는 영욕을 초월한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죽음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때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성경이 모세의 죽음을 결코 부정적으로 그리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본문의 의도는 다분히 그의 죽음이 영광의 죽음이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우선 마지막 구절 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아론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30일간 곧 한 달간의 장례를 통하여 그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의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나이가 연로하신 어르신네들 중 열심히 운동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저는 그분들이 소원하시는 것이 꼭 장수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를 살더라도 건강하게 사시다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모세는 120세가 되어도 시력이 저하되지 않는 건강함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0세를 채웠습니다. 창6:3에 보면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이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고정하신 것을 볼수 있습니다. 지금도 의학자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능히 120세를 살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모세의 이런 말년의 모습은 평생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한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하늘의 위로였다고 믿습니다. 어떤 옛 설교자는 이를 가르쳐 ‘석양의 은총’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치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만찬) 기름을 머리에 부으시는 위로인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죽음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또 죽음으로 가는 길이 고통만이라고 가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의 길은 세상이 모르는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는 길인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로 불려진 스펄전 목사님도 말년에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시며 요양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많이 아프시지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 아파요. 많이 아파요. 그러나 이 나를 아프게 하는 고통보다도 주님은 더 가까이 저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이 오늘도 저의 위로요 기쁨이요 희망이십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고요. 승리할 것이에요” 한때 살 소망까지 포기하고픈 어려움을 경험한 바울도 고후1:5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루이스 교수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 간 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인생에서 두 번 중요한 선택을 했는데 소년 시절-안전을 선택했고, 노년에 그의 아내를 맞이하며 또 한번 선택을 했는데 이번에는 고난을 선택했다고 그런데 그 고난이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은 위로를 동시에 주었다고 말입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라면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우리의 인생이 되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임종의 길에서 이런 위로의 은혜를 경험하시려면 위로 받기에 합당한 성도의 자리에 평생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정상적인 성도라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죽음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3. 죽음은 인생의 주인을 높이는 시간입니다.


본문이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지적합니다. 5-6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부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더라” 그가 장사지낸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설명이 시도되어 왔습니다만 가장 유력한 신학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워낙 출중한 지도자여서 하나님은 그가 우상화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모세 자신의 위대성이라기보다 모세를 그렇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의 증언처럼 아무리 모세가 위대했어도 그는 결국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 그의 평생을 인도하셨다면 이제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바로 이런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죽었을 때 그가 섬겼던 제네바 도시 전체가 울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유언을 따라 그의 장례는 단순한 예배만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장례를 검소하게 하고,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을 가급적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그 후 이것을 너무 아쉽게 생각하는 칼빈의 제자중의 하나가 무덤 앞 돌 하나를 설치하고 이니셜로 JC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존 칼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의 평생의 주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 날 그의 무덤을 방문하는 우리는 그의 겸손한 무덤 앞에서 더 큰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아름다운 마지막은 그의 평생의 삶의 고백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의 인생의 좌우명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였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평생을 살고자 했고, 그의 겸손한 죽음으로 다시 한번 그의 주되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설교를 C.S.루이스 교수의 죽음과 그의 아내의 죽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 ‘헤아려 본 슬픔’ 마지막 단원에서 루이스 교수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묵상을 단테의 신곡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끝맺고 있습니다. “단테는 그리워하던 뻬아트리체를 만나 신 앞까지 함께 갔으나 홀연히 뻬아트리체는 사라지고 그녀가 영원의 자리에 올랐음을 통보받는다. 단테는 비로소 실망을 떨치고 뻬아트리체와 함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한다”고. 그리고 뻬아트리체처럼 그녀가 남긴 마지막 미소는 이제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다고, 그것은 그녀의 주님이신 그분을 향한 미소였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아내가 마지막 남은 숨결로 고백한 말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인되신 하나님의 평화의 품으로 인도하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의 주인,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높이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어느 날 우리의 죽음의 날에 진실로 우리의 주인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날을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참으로 높이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십시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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