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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5

모여드는 다윗, 흩어지는 사울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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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드는 다윗, 흩어지는 사울”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도피하는 생활을 한다. 다윗은 쫓기면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든다. 아둘람 굴에서만 400명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 반면에 왕궁에 있는 사울에게는 사람들이 떠나갔다. 권력자의 외로움에 지친 고백을 들어보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8)
  빈손으로 나선 다윗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사울에게서는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윗은 사람을 모으겠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설득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신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재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사울은 에돔 출신의 기회주의자 도엑 한 사람만이 제사장들이 다윗을 숨겨준 것을 고발했다. 다윗을 신앙 중심의 결속이었고, 사울은 이익 중심의 결탁이었다.
  내게는 타고난 친화력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때 반장 투표를 할 때, 단 1표를 얻었다. 그래서 1년 동안 내 별명이 “ 한표”였던 기억이 난다. 교만, 독선, 이기심, 희생없는 모습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 충격으로 낮아지는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 때, 투표를 통해서 반장이 되었다. 태도와 인격이 변화되는데, 오래 시간이 걸림을 알게 되었다. 그후 목회자가 되어서 교사들을 이끌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접촉을 통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멀리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엎드리기 시작했다. 더욱 말씀 앞에 복종하는 생활에 힘을 기울였다. 그랬더니 흩어졌던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했더니,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영적 리더십이다.
  다윗에게 있는 습관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묻는 습관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세히 묻는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삼상23:2)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삼상23:4) 아마 성경 상의 인물 중에 다윗보다 열심히 하나님께 물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총리 비서실장을 10년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들은 비서실장을 1년 하기도 힘든데, 10년을 했다. 그 비밀이 두가지라고 했다. 첫째, 모든 영광을 총리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둘째, 매사에 작은 일도 항상 물으면서 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삶도 이와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우리를 위기 중에도 세울 것이다.

성실이 재능을 이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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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이 재능을 이긴다.”

  성실이 재능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반짝이는 재능도 꾸준한 성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인생에 있어서 바른 방향은 중요하다. 방향이 올바르면, 성실하게 가기만 하면 승리한다. 방향은 맞는데, 당장의 열매가 없어서 낙심하곤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낙심의 해로움은 무엇인가? 중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실은 중단없이 계속 가게 만든다.
  다윗은 성실함 때문에 쓰임받았다. 사무엘이 왕을 택할 때, 1번부터 7번 아들은 모두 집에 있었다. 유독 막내 다윗만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다. 다윗은 현장을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삼상17장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있는 세 아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서 다윗을 보낸다. 이 심부름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왜 이새는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켰는가?  아마도 아버지 이새가 보건대, 막내 다윗이 가장 성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4번부터 7번 아들을 시켰으면, 중간에 다른 일을 할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을 맡길 때에는 성실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다윗의 성실성이 심부름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심부름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성실성은 항상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힘이 되곤한다. 시78편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부른 이유가 그의 성실성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78:70-72) 성실하면, 기회가 온다. 성실하면, 쓰임받는다.
  요셉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역시 아버지에게 심부름을 부탁받는다. 원래 형들은 세겜에 있었다. 그런데 세겜은 기분 나쁜 곳이다. 과거에 하몰의 일족을 몰살시켰던 장소이다. 언제 보복의 칼날이 올 지 모르는 장소였다. 그래서 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셉이 도착했을 때, 형들은 세겜에 없었다. 요셉은 성실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형들이 도단으로 간 것을 알았다. 요셉은 성실하게 물어서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가게 된다. 도단에 도착할 때,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외치며 그를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요셉의 성실성만 없었다면 그는 형들에게 팔리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실을 귀중히 보시고, 장차 애곱의 총리로 쓰임받을 준비를 시키신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은 항상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실은 길을 열고, 성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성실은 승리로 이끈다. 재능은 부족해도 좋다. 그러나 성실함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히복시키는 사랑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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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시키는 능력, 사랑”

  베드로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넘어졌다. 부활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왔다. 사랑의 터치로 넘어진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킨다.  회복시키는 능력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떤 것인가?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같이 밥먹자고 하신다. 과거의 실수나 잘못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신다. 나는 이런 예수님이 좋다. 왕상19장에도 보면,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에게 사명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냥 먹이시고, 재우신다. 그래서 엘리야는 회복된다. 사랑의 어루만짐은 회복의 길로 이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교적 용서를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용서를 해도 꼭 토를 단다. “그때 왜 그랬어?” 납득이 안되면, 용서도 안되는 모양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다 납득해야 하는가? 다 따져야 하는가? 예수님은 묻지 않는다. 너 왜 배반했니? 왜 낙심했니? 아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냥 조반을 먹으라고 제안하신다. 주일에 예배드리지 않고, 놀러 가다가 사고 당한 사람이 있다. 심방이라고 찾아가서 회개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을 보았다. 회개는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깨우침을 주시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강요로 회개하는 예는 거의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다. 변화된 이름은 베드로이다. 그런데 시몬이라고 부르신다. 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목사라는 칭호도 때에 따라서 영광스러울 때와 수치스러울 때가 있다. 하나님께 잘 쓰임받고 있을 때, 목사 누구 누구라고 부르면 영광스럽다. 그러나 교통위반을 하거나, 질서를 깨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잘못했을 때, 덜 수치스러워할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시제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만약 과거로 물었다면, 추궁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나를 부인할 때, 나를 사랑했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지금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질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리새인은 꼬투리를 잡으려고 질문한다. 즉 속에서 나쁜 것이 나오도록 질문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속의 좋은 것을 끄집어 내려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속의 사랑을 끌어 내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속의 믿음을 끌어 내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속의 은혜를 끌어 내려고 하신다. 이런 사랑 앞에 베드로는 변화된다. 변화를 보고 싶은가? 예수님의 사랑을 해보라. 나와 당신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칭찬의 위력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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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의 위력”(5.24.06)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다. 켄 블렌차드의 베스트셀러이다. 저술동기는 이렇다. 플로리다의 시 월드에서 고래 쇼를 보았다. 전혀 춤을 출 것 같지 않던 고래가 춤을 추는 것이다. 고래는 춤을 출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머리는 둥그렇고, 앞지느러미는 짧고, 꼬리는 중심잡기도 힘들다. 그런데 고래는 춤을 춘다. 어떻게 고래가 춤을 추는지, 조련사에게 물었다. 조련사는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말했다. 원하는 행동을 하면, 충분히 칭찬해주고, 고등어 한 마리를 준다. 그것을 반복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것이다. 블렌차드는 아주 쉽게 생각했다. 춤출 구조로 생기지 않은 고래가 춤출 수 있다면, 인간을 춤추게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사람을 춤추게 만드는 것은 고래를 춤추게 만드는 것의 10%의 힘으로도 가능하다. 칭찬을 통해서 주변을 모두 춤추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칭찬은 변화시키는 위력이 있다.
  칭찬을 받으면 자존감이 생긴다. 열등감과 상처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거의 칭찬과 격려를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건강한 자존감은 칭찬과 격려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대개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경우가 더 많다. 한번 물어보라. 당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일사천리로 대답한다. 칭찬을 듣지 못한 인생은 장점에 집중할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 들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를 안다. 매순간 피드백을 통해서 확인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중이 가능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가지치기가 가능한 인생을 산다. 반면 칭찬이 없는 인생은 자신의 장점을 모른다. 대개 이것 저것 손대보다가 시간만 낭비하는 인생을 산다. 칭찬은 건강한 자존감을 세운다. 칭찬은 장점을 알고, 집중케 하는 능력이 있다.
  칭찬은 밝게 만든다. 자꾸 격려하고 칭찬하면 밝아진다. 칭찬이 있는 모임은 밝다. 칭찬이 있는 인격은 항상 밝다. 밝아야 사람이 모인다. 사람이 모여야 일이 이루어진다. 성도는 빛의 자녀들이다. 칭찬과 격려를 통해서 어두운 분위기를 밝은 분위기로 변화시켜야 한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전 과목이 “가”였다. 그리고 단 한과목이 “양”이었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왔느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말아라!”  아이의 아버지는 칭찬과 격려의 사람이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분명히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사회가 너무 어둡다. 가정도 어둡고, 교회도 어둡다. 칭찬을 통해서 밝게 비추자. 칭찬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기름진 토양을 제공할 것이다.

stop 할줄 아는 신앙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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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할 줄 아는 신앙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전쟁의 승리와 예배의 회복과 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이 더 중요하다. 다윗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짓지 않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하22:8) 능력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단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사람들은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면, 그냥 해버린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가는 것보다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라는 명령에 불순종하면, 일이 늦어지거나 열매가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단하라는 말에 불순종하면, 일이 크게 벌어진다. 파란불이 들어왔을 때, 자동차가 가지 않고 머뭇거릴 수 있다. 그러면 기껏해야 뒤에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치거나, 경적을 울린다. 그러나 정지하라는 빨간불에 불순종하면, 대형 사고를 당할 수 있다. 가는 것보다 정지가 더 중요하다.
  바울은 아시아로 선교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성령이 막았다. 바울은 또 비두니아로 선교를 가려고 했다. 그때마다 예수의 영이 막았다.(행16:6-7) 바울의 위대성은 이렇게 막힐 때마다 정지했다는 점이다. 고집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차이가 있다. 고집은 자기의 의지로 억지로 하는 것이고,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서야할 때와 가야할 때는 구분하는 능력이다. 신앙의 기초는 정지 신호에 설 줄 아는 능력이다. 힘이 있을 때는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중단하라고 하는 것을 중단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성숙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명하셨다. 중단의 명령이다. 불신자도 성실성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 단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할 수 없다. 진정한 구분은 정지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신자는 안식한다. 그러나 불신자는 안식하지 못한다. 안식년에 농사짓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나님은 믿음으로 안식하는 자에게 그 전해에 3년 쓰기에 족한 식량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레 25:20-21) 믿음으로 안식하는 사람은 2년치가 아닌 3년치의 식량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신자는 안식하고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대하36:21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해석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제대로 안식하지 않아서 70년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지적한다. 안식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포로로 억지로 안식케 했다는 해석이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이 말을 확대해석 하면, 누구나 안식은 한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안식하고,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안식하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안식한다. 안식은 믿음있는 자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근거로 중단하는 것이 믿음이다.

변화를 추구하지 말고 그냥 감사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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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추구하지 말고, 그냥 감사하라.”

  인생에는 원치 않는 상황이 올 때가 많다. 누가 가난하고 싶고, 누가 질병으로 고통받고 싶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한다. 사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만큼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도 없다.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가?
  대개 원망과 불평이 있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변화만을 추구한다. 변화가 쉽게 되지 않으면, 다시 원망하고, 낙심한다.
  30여년전에 나온 멀린 캐로더스의 "Prison to praise"(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감사와 찬송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를 잘 보여준다. 알콜중독인 아버지를 둔 어떤 청년이 있었다. 모든 중독이 그렇지만, 알콜 중독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와 아들 내외가 아버지의 변화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았다. 원망하고 낙심하는 대신 그냥 감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셔도, 심하게 주정하지 않으니 감사했다.  술마시다 쓰러져도 주로 집에서 쓰러지니 감사했다. 그냥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감사하기 시작했다. 얼마후 아버지가 질문했다. “텔리비전을 보니, 마약중독자도 변화되었다던데, 알콜 중독도 변화될까?” 예수 믿겠다는 뜻이었다.
  변화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은 다만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릇이라고 했다. 그릇의 가치는 담긴 내용에 따라 좌우된다. 밥이 담기면, 밥그릇이고, 물이 담기면 물그릇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리에서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믿음의 성장이란 한걸음 더 나아가 미리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풀려나가고 감사한 것이 아니다. 그 있는 곳에서 감사와 찬송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미리하는 감사의 능력은 옥문도 열어 버린다. 나는 시37:4의 말씀을 좋아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순서를 보라.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나중에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변화는 발버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찬송하자. 그것이 오히려 더 강력한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다.

매복의 인생은 아름답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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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의 인생은 강력하다.

  여리고성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이 예상과는 다르게 작은 성 아이에서 패배했다.아간 개인의 범죄, 공동체의 교만 등이 패인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패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아이와 싸워서 이겼다는 점이다. 한 때 잘못으로 인해 패배했지만, 다시 회복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표징이다. 스프링, 고무줄과 같이 탄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영적 탄성이 살아있으면, 비록 일시 패배하지만, 다시 승리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반성의 힘, 회개의 힘은 바로 영적 탄성의 핵심요소이다. 넘어지지 않는 법보다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영적 탄성의 힘을 길러야 한다.
  두 번째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돋보이는 전략은 “매복전략”이다. 여호수아는 3만명과 5천명을 매복시킨다. 그리고 주력부대로 아이성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후퇴한다. 첫 번째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아이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이스라엘을 추격한다. 그때 매복한 군사들에 의해서 아이성은 점령되고, 아이 사람들은 협공에 의해서 전멸된다. 드러내지 않는 힘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않는 삶은 매우 중요하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 생명이 있다. 나무의 생명은 드러나지 않는 뿌리에 있다. 빙산의 99%는 물 속에 잠겨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곳이 강력한 것이 진짜 강력한 힘이다. 생명이 충만하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 매우 강한 힘들이 묻혀 있어야 한다. 5천을 5만같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5만을 5천같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매복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항상 자기 힘보다 더 강력하게 일한다. 매복은 적이 예상하지 못한 병력이기에 5천을 가지고도 5만같이 활용할 수 있다. 반면에 과시한 힘은 모든 전력이 다 드러나 있기에 약하다. 드러난 병력은 5만이라 할지라도 5천정도의 힘밖에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 병법에 나오는 병법의 최고수는 ‘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매복은 적을 교만하게 만들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철저하게 매복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작은 힘을 가지고도, 마침내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매복한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과시한다. 히스기야 왕이 자신의 내탕고의 보화를 바벨론 사신에게 자랑하고, 과시했다. 자랑한 모든 것이 바벨론에 옮겨갈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한다. 자랑하면 빼앗긴다. 그러나 매복하면, 10배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당신에게 숨겨진 힘이 있는가? 능력을 묻어두라.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힘을 기르라. 숨은 실력을 닦아 두라. 드러나지 않은 자산을 늘리라. 당신의 미래는 영광스러울 것이다. 매복의 인생은 강력하다.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은 이유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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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은 이유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 노예 사회에서는 주인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주인의 부인을 욕보이려고 한 노예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보낸 것일까?  일전에 우연히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요셉에 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설명이 가능한 단서를 발견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극적인 모습으로 요셉에게 다가와 유혹한다. “오늘밤 나와 즐기자” 요셉은 “사모님 왜 이러시나요?”하며 거절한다. 보디발의 아내의 육탄공격이 계속되자, 요셉은 겉옷을 벗어두고 도망친다. 사랑이 변화되면 증오가 된다고 했던가!  보디발의 아내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순간 소리를 지른다.

장면이 바뀌었다. 요셉은 잡혀왔고, 사람들은 주변에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보디발의 아내는 소리를 지르면서 요셉을 죽이라고 외친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묻는다. “네가 그랬나?” 요셉은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 자리에서 보디발은 이례적으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으로 보낸다.  또 장면이 바뀐다. 보디발의 침실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보디발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든다. “어찌 나를 욕보이려는 놈을 죽이지 않는거요?” 그때 보디발은 정색을 하며 그의 아내에게 말한다. “나는 요셉을 믿는다.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은 다 진실이야.” 그러면서 이 요망한 것 네가 유혹했지 하면서, 아내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은혜가 되지 않아서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디발은 요셉의 결백을 믿었다는 점이다. 평상시 요셉의 삶을 통해서 보았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만 체면과 부끄러움 때문에 아내의 잘못을 폭로하지 않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낸 것이다. 실제로 감옥에 가서도 보디발은 요셉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 같다.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창 40:4) 창39장과 창40장 사이에 바로의 시위대장이 바뀌었다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창40장에 나오는 시위대장은 보디발이다. 그 보디발이 술맡은 관원이나 떡 맡은 관원이 들어가는 특별 감옥에 요셉을 집어 넣어 거기서도 역할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는 말이 된다. 이제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명확해진다. 보디발 조차 요셉의 결백을 믿을 정도로 요셉의 평상시의 삶은 신실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이 감옥으로 갔다는 사실 자체가 간증이요  승리이다. 요셉에게 있어서 감옥은 낮아짐이 아니라 승리의 장소였다. 장차 하나님이 높이시기 위한 자궁이요 모판이었다. 어떤 자리에 가든, 어떤 상황이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Coram DEO)은 중요한다.  신뢰를 주는 일관된 삶을 살라.  위기의 순간에도 건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량주의로 표현되는 열등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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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주의로 표현되는 열등감

  만화영화 슈렉을 보면, 슈렉과 당나귀 덩키가 악당의 성을 방문하게 된다. 엄청나게 큰 성을 본 당나귀 덩키가 이렇게 말한다. “우와 무지 큰 성이다!” 그때 슈렉이 이렇게 말한다. “성주가 건물에 대해 열등감이 있나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속에 공허감과 부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크기로 승부보지 않는다. 어느 교회의 수양관을 가본 적이 있다. 얼핏보면, 그리 크지 않은 건물 같이 보인다. 왜? 건물의 단면을 정문으로 나오게 만들고, 산과 직각으로 건물을 길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엄청 큰 건물인데, 입구쪽에서 보면,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건물을 보면서, 그 교회의 자신감을 보았다.
  건강함이란 물량,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과 현실에 뿌리를 내린 걸음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부는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2달 가까이 유럽과 중동으로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으니, 신학을 한다고 대답했다. 말렸다. 왜? 현실의 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을 때의 여행이니까 꿈의 여행일 것이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리나 지금은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디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좋을 것을 지금 다 써버리면, 나중에는 부담만 남는 것이다. 후에는 분명 헌신하고, 포기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느냐고 원망할 것이 분명하다.
“행운 찾기”보다 “행복 찾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네잎 클리버는 희귀한 것이다. 찾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의 1%도 발견하기 힘든 것이다. 행운을 추구하는 것은 도박의 확률에 도전하는 것이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행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로또 당첨 이후에 깨진 가정도 많다. 세잎 클리버는 흔한 것이다.  행복이란 바로 옆에 있는 찾기 쉬운 것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대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옆에 좋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 있다.
  누가 책을 쓰는가? 매일 한 페이지씩 쓰는 사람이다. 누가 마라톤을 뛰는가? 매일 1킬로씩 더 뛰는 사람이다. 누가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가? 매일 1문장씩 외우는 사람이다. 대개 360개 정도의 문장을 외우고 있으면, 웬만한 일상표현은 가능해 진다. 왜 외국어가 안되는가? 매일의 걸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365로 나누면 힘들 것이 없다. 365일 1페이지를 쓰는 사람은 책 쓰는 것이 힘들지 않다. 365일 한 문장을 외우는 사람은 3년에 한 나라 말을 익혀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은 내실이 있다. 내실 있는 사람은 과시하지 않는다. 행복은 도박이 아닌 매일의 걸음에 있다.

물량주의로 표현되는 열등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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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주의로 표현되는 열등감

  만화영화 슈렉을 보면, 슈렉과 당나귀 덩키가 악당의 성을 방문하게 된다. 엄청나게 큰 성을 본 당나귀 덩키가 이렇게 말한다. “우와 무지 큰 성이다!” 그때 슈렉이 이렇게 말한다. “성주가 건물에 대해 열등감이 있나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속에 공허감과 부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크기로 승부보지 않는다. 어느 교회의 수양관을 가본 적이 있다. 얼핏보면, 그리 크지 않은 건물 같이 보인다. 왜? 건물의 단면을 정문으로 나오게 만들고, 산과 직각으로 건물을 길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엄청 큰 건물인데, 입구쪽에서 보면,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건물을 보면서, 그 교회의 자신감을 보았다.
  건강함이란 물량,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과 현실에 뿌리를 내린 걸음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부는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2달 가까이 유럽과 중동으로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으니, 신학을 한다고 대답했다. 말렸다. 왜? 현실의 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을 때의 여행이니까 꿈의 여행일 것이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리나 지금은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디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좋을 것을 지금 다 써버리면, 나중에는 부담만 남는 것이다. 후에는 분명 헌신하고, 포기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느냐고 원망할 것이 분명하다.
“행운 찾기”보다 “행복 찾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네잎 클리버는 희귀한 것이다. 찾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의 1%도 발견하기 힘든 것이다. 행운을 추구하는 것은 도박의 확률에 도전하는 것이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행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로또 당첨 이후에 깨진 가정도 많다. 세잎 클리버는 흔한 것이다.  행복이란 바로 옆에 있는 찾기 쉬운 것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대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옆에 좋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 있다.
  누가 책을 쓰는가? 매일 한 페이지씩 쓰는 사람이다. 누가 마라톤을 뛰는가? 매일 1킬로씩 더 뛰는 사람이다. 누가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가? 매일 1문장씩 외우는 사람이다. 대개 360개 정도의 문장을 외우고 있으면, 웬만한 일상표현은 가능해 진다. 왜 외국어가 안되는가? 매일의 걸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365로 나누면 힘들 것이 없다. 365일 1페이지를 쓰는 사람은 책 쓰는 것이 힘들지 않다. 365일 한 문장을 외우는 사람은 3년에 한 나라 말을 익혀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은 내실이 있다. 내실 있는 사람은 과시하지 않는다. 행복은 도박이 아닌 매일의 걸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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