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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4

으갠 감자의 영향력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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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깬 감자의 영향력

  사람들은 낮아지지 않은 은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보다는 견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장점을 드러내면 경쟁심이 촉발되지만, 약점을 나누면 공감대가 형성된다. 성도는 세상에서 좋은 영향력과 마음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 이율배반적인 두 가치를 얻는 길이 있다. 그것은 오르티스의 표현대로, “으깬 감자”가 되는 것이다.
  감자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 저항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감자를 철저하게 으깨 버리면, 감자의 형태는 사라진다. 형태가 사라지는 것은 물리적 변화이지, 화학적 변화가 아니다. 으깨졌다 하더라도 감자의 효능과 영향력은 전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형태는 깨지지만, 영향력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성도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장점과 은사는 자기 부인을 통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영향력도 유지할 수 있고, 심적 저항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병속의 소금은 영향력을 제대로 미칠 수 없다. 국 속에 들어간 소금이라야 영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데 병속의 소금은 형태가 유지되지만, 국 속의 소금은 자신의 형태가 다 녹아서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먹어본 사람은 소금의 강력한 영향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저항없이 쓰임받는 성도의 능력이다.
  살다보면, 고난의 때가 있다. 이 고난의 때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나의 약함과 나의 불행이 오히려 원수의 마음을 여는데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곱은 큰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그에게 여러 차례 속았던 에서는 노발대발하면서 분노심을 가지고 야곱을 만나려고 기다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를 만나기 이전에 야곱과 얍복강가에서 큰 씨름을 한다. 이 씨름은 처절한 육체적인 싸움이기도 했다. 싸우는 중에 머리까락 빠지고, 얼굴에 상처를 입고, 이빨도 몇 개 부러졌을 것이다. 옷은 찢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환도뼈를 내리쳐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축복인가?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을 보면, 에서가 야곱을 보고,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왜? 불쌍했기 때문이다. 부자되었다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야곱의 모습은 거지와 비견될 만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열리고, 야곱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깨지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니다. 깨진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깨진 모습은 당당한 모습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도 한다. 모든 좋은 것은 깨진 모습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영향력은 그대로 존재하고, 닫힌 마음은 열게 될 것이다. 약할 때, 강함되시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놀랍다.

고난 중에 드러난 감동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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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 드러난 감동"(3.23.06)--국민일보 컬럼



  고난은 쉬운 것이 아니다. 고난은 파괴적이다. 고난은 극심한 괴로움을 안겨준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런 깊은 고난의 수렁에 빠졌다. 흉년이라고 고향을 떠나 모압에 갔다. 모압은 피난처가 아닌 회한의 장소가 되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의지할 것 없는 초라한 노인이 되었다. 고난의 현장에서 보여준 나오미의 신앙은 빛을 발한다.
  첫째, 나오미는 고난 중에도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믿음’이 있었다. 고난을 당할 때,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자세와 누군가를 원망하는 자세이다. 고난이 깊었지만, 나오미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반성적 자세를 보였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룻1:13)고 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고난은 낮아지는 시간이다. 고난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고난 중에 시39편을 묵상하라.고난 중의 시편기자는 “내 혀로 범죄치 않겠다”고 다짐한다. 고난 중에 행하는 가장 큰 범죄는혀로 하는 범죄이다. “내 입에 자갈을 먹이겠다”고 고백한다. 내가 잠잠하면, 하나님이 왕성하게 나를 위해 일하신다. 그러나 내가 떠들면, 하나님이 잠잠히 나의 변화의 때까지 기다리신다.
  둘째, 나오미는 고난 중에도 며느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큰 고난이 임하면, 남의 고난은 잘 보이지 않는다.“자기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나의 고난과 씨름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고난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오미는 고난 중에도 며느리들의 행복에 마음을 두었다. 나는 불행하지만, 너희는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나온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형통을 기뻐하지 못한다.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시기와 질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오미는 고난 중에도 축복하는 넉넉함이 있었다. 그래서 보석같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나오미의 태도에 며느리들이 감동한다. 감동시키는 인생은 강력하다. 친구를 감동시키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감동시켰다. 다윗은 심지어 원수 사울을 감동시켰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이것은 다윗에게 열광하는 팬의 고백이 아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 고백인 것이다.
  사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감탄의 인생”과 “감동을 주는 인생”이다. 나의 자랑과 나의 장점을 나누면, 경쟁이 일어난다. 남들과 다른 탁월함을 나누면, 감탄이 터져나온다. 그러나 감탄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쓰디쓴 경쟁심과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나의 약점을 나누면, 공감대가 형성된다. 아픔 중에 축복을 나누면, 감동이 온다.

넘버원과 온리 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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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원(number one) vs. 온리 원(only one)

  세상은 우리에게 경쟁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독특한 자기 자신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에는 자기만의 영광이 있다. 만든 목적대로 살아갈 때 이 영광이 임하게 된다. 노트북은 문서나 인터넷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책받침대나 파리를 잡을 때 사용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사용하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자기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쓰임받을 때 영광이 임한다. 펜은 글을 쓸 때,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는데 사용해야 영광이 임한다. 우리 인간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영광이 있다. 주신 은사로 일할 때, 이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number one 이 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넘버원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허락된 자리도 아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자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only one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쉬운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사는 길을 찾고 있다. 고유함이 그 사람이 찾는 길이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프리 마돈나 홍혜경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오페로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소리를 찾아야 한다.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의 소리를 찾아야 같은 노래를 불러도 특별함이 전달된다.  그저 남을 흉내내기에 대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나 최상의 가치는 자기만의 독특성을 가지고 나올 때, 가능한 것이다.
  넘버원은 비교를 통해서 내려진 평가이다. 중심이 내가 아니라 남인 것이다. 남들이 인정해 주기 때문에 뿌듯해 하며, 남을 이겼기에 자랑스러운 것이 넘버원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이다. 그래서 인정받으면, 교만해지고, 인정받지 못하면, 낙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독특함을 가지고 가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엡2:10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란 구절이 나온다. 헬라어 원어에는 ‘포이에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poem'(시)이 나왔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시같이 만드셨다는 것이다. 독특한 예술로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masterpiece'(걸작품)라고 번역되어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것이 시적인 삶이요 걸작품으로서의 삶이다. 남이 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살라. 영광이 떠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이다.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살라. 사명의 길을 살라. 은사의 길을 살라. 고유한 길을 살라. only one이 되라. 그것이 인생이다.

함께 알할 줄 아는 사람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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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3.6.06)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일하도록 이끄신다. 예수님도 전도하러 보낼 때,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다. 제자 가운데 유독 가룟유다만이 홀로 생각하고, 홀로 행동하다가 범죄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팀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숨겨진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함께 일하려면,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에는 논지가 있어야 한다. 논지를 가지고 접근해야 설득 당하게 된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설득력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함께 일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항상 내 뜻대로만 이끌어갈 수 없다. 어떤 때는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상대와 보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일한다는 것은 보조를 맞출 줄 아는 수용성이 있다는 말이다. 능력은 있는데 고집 불통이라서 쓰임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고집스런 독불장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기쁠 때만 같이 일 할 수 없다. 고난도 같이 하는 것이 능력이다. 10여년전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인디언들은 단어를 만들어내지 않고, 설명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재미있었다. 인디언 이름 가운데 “주먹쥐고 일어서”가 있었다. “새 걷어차기”도 있었다. 추장의 이름이 “열마리 곰”이었다. 이렇게 개념으로 굳어지기 이전의 인간의 느낌에서 오는 설명은 이전에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함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한다. 진정한 친구의 개념을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자매 간사가 암으로 투병 중에 있다. 항상 밝고 믿음 좋은 리더였다. 지난 주일 저녁에 3명의 형제가 특송을 신청했다. 사랑하는 친구 간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찬양과 전체 성도들의 기도를 원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찬양이었다. 그리고 감동스런 기도가 이어졌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따뜻함과 믿음이 담겨졌다. 들어가는 그들에게 내가 인디언 식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함께 슬픔을 지고 가! 1,2,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싫어한다. 믿음 좋고 충성한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혈기로 펄펄 뛰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호언장담하고, 칼들고 설쳤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었다. “위하여”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이다.
남은 것에 집중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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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에 집중하라.

  어느 여대생이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안녕. 그동안 편지를 못드려서 죄송해요. 갑자기 기숙사에 불이 나서 편지를 못 썼어요. 지금은 병원에서 나왔는데, 의사 선생님 말로는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회복될거래요. 그런데 그 기숙사에서 날 구해준 남학생이 있었어요. 그래서 갈 곳이 없어서 그 아이 집으로 들어갔어요.  아참 늘 손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기뻐해 주세요. 제가 그 남자 친구의 아기를 가졌거든요. 곧 안아보실 수 있을 것예요.  사랑하는 딸로부터” 그리고 편지 뒷부분에 ‘뒷면을 읽어 주세요.’라고 써 있었다. “추신. 사실은 불도 나지 않았고, 저도 건강해요.  물론 임신도 하지 않았구요. 저는 남자친구도 없어요. 그런데 용서를 구할 것이 있어요. 이번에 성적이 좋지 않아요. F가 세 개있어요. 저는 아빠 엄마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시리고 믿어요. 안녕.” 이 편지를 읽고 처음에는 부모들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고, 그 뒤에 나오는 성적 문제는 문제로 생각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보다 큰 문제가 생기면, 작은 것은 문제도 아니다. 딸이 위트를 통해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많은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다. 실연을 당하고, 실직하고, 입시에서 낙방하고, 병에 걸리면, 모두 다 무너졌다고 느낀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별로 잃은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작은 돌멩이가 자기 신발 속에 있으면, 매우 커 보이지만, 남의 발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다.
  승리하는 사람은 승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 승리자는 항상 남은 것에 집중한다. 잃은 것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것에 바라보고 다시금 일어선다.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식상한 예화가 있다. 컵에 물이 반이 있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과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잃은 것을 보는 사람과 남은 것을 보는 사람의 시각의 차이이다. 남은 것을 보는 사람은 희망의 사람이다. 남은 것을 보는 사람은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3가지를 기도했다. “주여, 첫째,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옵소서. 둘째,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셋째, 이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것은 세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기도이다. 남은 것, 할 수 있는 것,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마음을 달라는 것이다. 남은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성장과 승리는 보장되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생각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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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으로 생각하라.

  이해 못할 일들이 많다. 유럽의 지성이었던 독일이 어떻게 히틀러를 추종하며,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는가? 정상의 양육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전쟁 중에 대규모 양민학살에 가담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독자적인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남이 내린 결정대로 맹종할 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에릭 프롬의 고전적인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보면, 인간은 스스로 결정 내리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남이 결정해 주기를 원한다. 남이 내린 결정은 좀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광기어린 일도 대담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창1:26을 보면, “다스리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다스림이 가능하려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이다. 신앙인이란 말씀의 공급을 받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는 존재이다.
  젊은이 사역을 하다보면 자주 접하는 장면이다. 남녀간에 문제가 생긴 커플이 있다. 그때 자매들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나는 오빠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자기 연민에 빠진다. 반면에 잘하든 잘하지 못했든 자기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다르다. 잘못에 대해서는 스스로 인정한다. 잘못을 인정하기 때문에 회개가 가능한 인생이 된다. 결코 남에 대한 원망과 저주도 없다.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세로 나간다. 이런 사람이 변화가 가능하고, 성장이 가능하다.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르다. 스스로 결정하려는 사람은 정보를 모은다. 그래서 시간이 감에 따라서 지식이 쌓이고, 똑똑해 진다. 반면에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이 없다. 종속적인 사고 속에 파묻혀서 퇴보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정보를 많이 모으고, 깊이 생각한다고 해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결정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있다. 누가 기도하는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새벽에도 오랜 시간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정보를 모으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책임지는 인생을 산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결정한 것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은 무능해지고, 생각이 없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결과가 잘못되면, 억울하다, 속았다라는 말만 남발한다.

요셉이 돈받고 곡식을 판 이유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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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돈받고 곡식을 판 이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 7년간 풍년, 7년간 흉년이 임하게 되었다. 요셉은 풍년 때 모아 두었던 곡식을 흉년 기간에 돈을 받고 팔았다.(창47:14)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요셉이 매점매석했다, 긍휼이 없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요셉이 곡식을 공짜로 주지 않고, 돈을 받고 판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낭비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만약 곡식을 공짜로 가져가라고 했다면, 엄청난 낭비가 발생했을 것이다. 7년 흉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람들의 절약과 검소함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전기를 아끼고, 절약하는 삶을 사는가? 전기값이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르게 하면,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절약이 이루어진다. 미국에서는 종이 타월 한 뭉치를 집어 그릇을 한번 씻고 버린다. 엄청난 자원낭비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종이 타월이 엄청나게 싸기 때문이다. 적절한 대가를 치루어야 절약과 효율이 발생한다. 인생의 고난과 결핍이 길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낭비없이 집중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이 되곤한다.
  둘째, 정신의 문제와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함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나머지는 다 무너진다. 항상 공짜 정신이 문제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새로운 휴대폰을 50만원 가까이 해도 쉽게 산다. 그런데 단기 선교를 간다거나, 수련회를 간다고 하면, 5만원 정도의 돈이 없다고 말한다.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옳지 않은 자세이다.  자립정신을 심겨주어야 한다. 받기만 하면, 원망이 앞선다. 처음에는 받는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조금 지나면, 당연히 여기고, 나중에는 주지 않으면 원망한다. 받는 사람은 결국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반면에 주는 훈련이 된 사람은 자세가 달라진다. 태도가 밝다. 주면서 사랑을 배운다. 주면서 실제로 용서한다. 수동적인 삶에서 적극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셋째, 경제 흐름을 유지해서 장기 침체를 막기 위함이다. 경제는 흐름이 중요하다. 요셉은 공급과 수요를 유지하는 정책을 통해서 기근 이후의 장기 침체를 방지했던 것이다. 흉년 중에도 경제가 마비되는 막았다.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고, 돈이 돌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경제 침체를 막았던 것이다. 요셉판 뉴딜 정책을 펼친 것이다. 공짜가 아닌 일해서 돈을 벌어야 전체 경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라는 일하는 사람이 나와야 건강해진다. 일하는 모습과 돈이 도는 모습이 있어야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요셉은 의욕만으로 일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 일한 사람이다. 슬로건은 귀에는 솔깃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힘은 약하다. 그러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한 지혜는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다.

무리한 명령을 들었을 때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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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명령을 들었을 때”

  100% 확신하거나, 100% 납득할 수 있는 일에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무리해 보이는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때, 열매와 기적이 나타난다.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그릿 시냇가로 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거기서 가난한 과부의 도움으로 고난을 넘기라는 것이다. 무리한 명령같이 보인다. 첫째, 가뭄 중에 100킬로가 넘는 길을 걸어서 가라는 것이 무리이다. 둘째, 시돈은 엘리야를 핍박하는 이세벨의 고향이다. 시돈으로 가라는 말은 적진의 한 복판에 가라는 말과 같다. 셋째,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남성의 처지로 스캔들의 위험이 있는 과부의 집으로 가는 명령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가난한 집이다. 넉넉한 부자 집에 가라고 하면, 부담이 덜할 터인데,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의 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첫째, 하나님이 시돈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적 의미이다. 원수같은 이세벨의 고향이지만, 그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은 세워진다는 것이다. 사르밧의 뜻이 “용광로, 도가니, 연단”이다. 용광로를 통과한 강한 엘리야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 환경때문에 말씀까지 묶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에게보다 먼저 자신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기름과 가루가 가뭄이 그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듣기는 좋지만, 믿기는 힘든 말이다. 이것은 말씀 증거자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헌금을 설교하거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자신있게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하고, 결과적으로 순종의 복을 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결국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늦은 퇴근이 있는 사람에게 새벽 기도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상황에 앞선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될 것 같은데, 순종하면, 열매와 기적을 맛보게 된다.
  신앙은 수준의 문제이다. 자기 판단과 자신 상황에 매여서 행하다 보면, 결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100% 믿고,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으면, 상상 못할 열매를 거두게 된다. 수준높은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내 견해가 아닌,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 말씀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피해의식 vs 책임의식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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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vs 책임의식

  한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카드빚이 큰 문제가 되었었다. 지불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드사용을 억제하지 못하는 중독 현상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카드빚에서 벗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정신자세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카드빚의 문제를 정부의 정책의 실패,불우한 환경 등으로 전가하는 사람은 쉽게 카드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카드빚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자세로 나온 사람은 거의 카드 중독에서 벗어났다. 책임의식이 회복의 첩경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스림’(창126)에 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책임지고, 판단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형상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여자에게, 뱀에게 돌리며 책임회피했다. 뱀을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셨건만, 뱀의 제안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책임을 깨닫지 못했다.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회개가 가능하다. 범죄한 인간이 항상 잘 할 수는 없다. 범죄하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책임 하에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야 한다. 틀려도 내가 틀린 것이고, 잘못해도 내가 잘못한 것이고, 선택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틀렸기에, 내가 고칠 수 있다. 내 판단이기에 잘못되어도 그 판단을 고칠 수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이성적인 문제가 벌어질 때가 있다. 성인이므로 자신의 판단으로 모든 일을 행한 것이다. 그 행한 일이 잘못되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원해서 행한 일이면서 ‘당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자매들이 야한 옷을 입고 다녀서 내가 당했다’, ‘어떤 오빠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내가 당했다’는 식이다. 책임의식없이는 회개도 변화도 불가능하다. 대개 변화가 빠른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정확히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성장도 가능하고, 회개도 가능한 인격이다.
  자기가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기도한다. 선택은 자기가 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바르게 선택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이 기도한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원망하지 기도하지 않는다. 책임의식있는 사람이 머리를 쓴다. 생각하면서 일한다. 판단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열심히 정보도 모으고, 조언도 듣고, 자신의 선호도 살핀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한다. 모략으로 싸운다.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잠 24:6) 그래서 항상 강하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가야한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 회개가 가능하고, 성장이 가능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한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카드빚이 큰 문제가 되었었다. 지불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드사용을 억제하지 못하는 중독 현상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카드빚에서 벗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정신자세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카드빚의 문제를 정부의 정책의 실패,불우한 환경 등으로 전가하는 사람은 쉽게 카드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카드빚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자세로 나온 사람은 거의 카드 중독에서 벗어났다. 책임의식이 회복의 첩경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스림’(창126)에 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책임지고, 판단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형상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여자에게, 뱀에게 돌리며 책임회피했다. 뱀을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셨건만, 뱀의 제안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책임을 깨닫지 못했다.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회개가 가능하다. 범죄한 인간이 항상 잘 할 수는 없다. 범죄하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책임 하에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야 한다. 틀려도 내가 틀린 것이고, 잘못해도 내가 잘못한 것이고, 선택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틀렸기에, 내가 고칠 수 있다. 내 판단이기에 잘못되어도 그 판단을 고칠 수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이성적인 문제가 벌어질 때가 있다. 성인이므로 자신의 판단으로 모든 일을 행한 것이다. 그 행한 일이 잘못되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원해서 행한 일이면서 ‘당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자매들이 야한 옷을 입고 다녀서 내가 당했다’, ‘어떤 오빠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내가 당했다’는 식이다. 책임의식없이는 회개도 변화도 불가능하다. 대개 변화가 빠른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정확히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성장도 가능하고, 회개도 가능한 인격이다.
  자기가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기도한다. 선택은 자기가 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바르게 선택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이 기도한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원망하지 기도하지 않는다. 책임의식있는 사람이 머리를 쓴다. 생각하면서 일한다. 판단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열심히 정보도 모으고, 조언도 듣고, 자신의 선호도 살핀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한다. 모략으로 싸운다.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잠 24:6) 그래서 항상 강하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가야한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 회개가 가능하고, 성장이 가능한 인생을 살게 된다.

손해좀 보고 살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9

복사 http://blog.naver.com/kco6567/12002896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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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좀 보고 살자.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항상 갈등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갈등도 희생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눈녹듯이 녹아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희생은 어머니의 자녀 양육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성장케 하는 힘이 있다. 동시에 희생은 극심한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능력이 있다.

  그러면 쉽게 설명해서 희생이 무엇인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내 일’도 아니고, ‘네 일’도 아닌 것이 있다. 분명히 누군가가 해야하지만, 명확하게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내 일’도 아닌, ‘네 일’도 아닌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서는 것이 희생이다. 나는 얼마나 내 일도 아니고, 네 일도 아닌 일에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 나셨는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길은 희생에 있다. 사람의 분노의 불길을 끄는 것은 희생에 있다.

  해외 여행을 떠날 때, 개개인이 환전을 하면, 시간이 오래걸리고 불편하기 때문에 몇사람이 돈을 모아서 환전을 할 때가 있다. 3명이 모여서 모은 돈이 10달러가 되었다고 하자. 문제는 3명이 공평하게 나누는데 있다. 한 사람의 지분은 33.33%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대개 인간 갈등의 문제는 이런 단순한 문제에서 발생한다. 이럴 때, 기꺼이 내가 3달러를 가질테니, 둘 중에 한 사람이 3달러와 4달러를 가지라고 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희생을 감수한 사람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심한 갈등 중에 있는 모임에서는 누가 3달러와 4달러를 갖게 되는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런 갈등까지도 녹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2달러를 가질 테니, 나머지 두사람이 4달러씩 가지라고 하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다. 2:4:4의 원리를 붙드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희생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 들어가 보면, 그렇게 100% 희생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자기 지분 33.33%에서 3.33만 포기하면 평화가 임한다. 더 극심한 상황에서는 자기 지분 13.33%만 포기하면, 평화가 임한다.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의 30-40%만 포기하면, 완전한 평화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 관계 속에서 성자가 된다. 이것이 희생의 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많다. 희생을 외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작은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신앙이 무엇인가? 자기 부인에 있고, 십자가를 지는데 있는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생활 속에서 손해 좀 보고 살자. 희생하며 살자. 그러면 평화를 맛볼 것이다. 어떤 때는 좀 더 심한 희생을 감수해 보자. 사람들에게 작은 성자라는 칭호를 듣게 될 것이다. 이런 작은 성자 놀이도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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