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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2

어미 독수리의 사랑"(10.21.2005)

1. 익숙한 것을 통한 설명 :  광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독수리이다. 독수리의 새끼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어미 독수리의 사랑과 같다는 것이다. 독수리 어미는 새끼를 위해서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보금자리는 생명이 가능케 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 왜 그런가?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1-12)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어미 독수리의 심정을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상식에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2. 보금자리를 생각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생각하라 : 잃은 것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초점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관심을 전화하라는 것이다. 좋은 보금자리는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더 높은 차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잃은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 이후에 핍박이 왔다. 그래서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잃은 예루살렘만을 추억하지 않고, 있는 곳에서 더 큰 가치를 발견하고 복음 증거했다. 그래서 땅끝까지 복음 증거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어려움이 미래의 길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

3.  최선을 다해 날개짓하라 : 날개짓이 믿음이다.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어미 독수리의 목적은 새끼의 날개짓이다. 나는 것은 처음부터 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밑에서 받아준다. 그래도 날개짓하고 또 날개짓해야 한다. 떨어뜨리는 이유는 날개짓 자체가 목적이다. 어려움이 올 때, 최선을 다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날개짓하라. "그 과정이 목적이다." 떨어져도 날개짓은 헛수고가 아니다. 내 힘이 강화되거나,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주를 믿고 의지하라.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날개짓하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책을 외면하면 미래의 영토를 다 잃게 된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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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외면하면, 미래의 영토를 다 잃게 된다." (10.14.2005)

1. 보수의 패배, 진보의 승리 : 일전에 "책조차 읽지 않는 한국의 보수들"이라는 컬럼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80년대 대학가에서는 "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이념 서적이 엄청나게 팔렸다. 좌파성향의 진보세력은 대학에서부터 엄청난 독서로 이념화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이념으로 무장된 세력이 지금의 실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보수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당시에는 다수였는데, 결국은 주도권을 다 놓치고, 초라한 반대를 하는 세력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의 부흥은 책을 통한 부흥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진보좌파의 위선과 허구를 파헤친 "쓸모있는 바보들" "뉴스의 속임수" 등이 꾸준히 팔리고,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책읽는 그룹이 미래를 잡게 되어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보수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향만 보수를 외치고, 책은 읽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히 보수의 책은 사라지고, 독자가 있는 진보의 책들만 서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은 보이는 책을 읽게 되는 것이고, 점점 보수의 가치는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일리있는 지적이다.

2. 책을 외면하는 성도들 : 이제 교회의 문제로 들어와 보자. 한국 성도들은 정말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리고 서점 가기를 외국여행하듯이 생소해 한다. 그러면서 교회의 부흥을 외치고 있다. 한국교회가 최고로 부흥할 때, 역시 독서 인구도 최고 수준을 보일 때였다. 최근 기독교 서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 대형 서점의 기독교 섹션이 줄어들고 있다. 책을 읽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베스트셀러의 유익이 무엇인가? 1권의 베스트셀러를 통해서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책 20권 정도를 발간할 수 있는 자본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통해서 독서 인구를 늘려 나갈 수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읽을 수 있는 가치있는 책을 많이 양산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자녀들의 미래와 교회를 미래를 예비한다면, 많은 기독교 서적은 구입해서 읽어야 한다. 출판이 활성화되고, 서점이 살아나는 것이 바로 교회가 사는 길이다.

3. 기독교 서적이 살아야 한다. : 교회 부흥을 위해서 많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서점에 가서 기독교 서적을 많이 사서 읽는 것도 미래의 교회의 부흥을 이끄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책을 사는 일에 대가를 치르라. 공짜로 책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 문화비의 상당 부분은 책값으로 써야 한다. 책을 읽는 사람만이 미래의 주역이 된다. 교회 부흥은 기독교 서적 독서로부터 오게 될 것이다.

설득당하는 인생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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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당하는 인생"(10.7.2005)

1. 설득하면서 사는 인생 : 목사는 설교를 많이 한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는 '선포'이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면, 설교는 '설득'이다.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납득하게, 이해되게, 무릎을 치면서 받아들이게 전하는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어야 설교가 제대로 전달된다. 왜 예화, 유머, 큰 소리를 지르며 설교하는가? 다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목사의 경륜이 깊어지면서, 느는 것은 설득력이다.

2. 설득 당해야 넓어진다 : 목사가 말씀을 가지고 설득하는 것은 당연하고,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때는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 다른 분야까지 설득하려고 한다. 독선인 것이다. 그래도 본인은 모른다. 그래서 목사 된지 오래된 분을 보면, 관계성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있다. 오랜 기간 설득만 하다가 생긴 일종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항상 옳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이 다 맞지도 않다. 성장하려고 한다면,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되는 인격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유연해지지 않고는 변화될 수 없다. 나는 정확한 논지(argue)를 가지고 설득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설득 당했을 때, 매우 기분이 좋다. 성장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내가 보는 눈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젊은이들 사이에서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패션 디자인을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의 조언대로 옷을 입으니, 매우 어색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훨씬 세련되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내 눈은 '개눈'이었던 것이다. 전문가의 눈이 나의 눈보다 나았던 것이다. 대가의 말에 설득 당하는 것이 성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분야에서 설득 당하니까,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진다. 나의 작은 울타리 안에 양떼들을 가두어두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득 당하는 인생이 아름답다.

생각이 중요하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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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중요하다."(9.9.2005)

1.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 : 롬12:2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 그러면 변화의 중심축, 출발은 어디인가? 그것은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이다. 각 분야에서 크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생각이 다르다' 생각이 어떤 사람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원하는가? 먼저 생각부터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2. 생각의 영향력 : 영화 진주만이 기억난다. 모든 조종사들이 활주로가 짧아서 이륙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륙을 성공한다. 그 이후 모든 조종사들이 성공적으로 이륙한다. 이전까지 하지 못했던 이유는 생각의 장벽에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생각의 장벽이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사람이 중요하다. 생각의 장벽을 깨는 그 한사람이 필요하다. 벽을 깨는 한사람만 있으면, 전체는 변화된다. 생각은 신체에도 영향을 준다. 재미있는 생각,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몸이 가볍고, 활발해진다. 흥분된다.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배출된다. 반면 부정적인 생각, 두려움은 아드레날린이 나와서 근육이 수축시킨다. 그래서 몸이 굳어진다. 12명의 정탐꾼의 운명을 가른 것은 무엇인가? 가문, 능력, 학력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이 운명을 바꾼 것이다.

3. 하나님 방식대로 생각하라 : 말씀을 묵상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이 되게 하라. 말씀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다. 성경의 시각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물으라. 복이 무엇인가?  "복있는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말씀 묵상이 복이다.  말씀을 읽으라. 그래야 생각이 바뀐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말씀은 생각을 변화시킨다. 생각을 바꾸면, 열매가 나타난다.  창조적인 기적이 나타난다. 새벽침대가 새벽무릎된다. 의존적인 사람이 자립적인 사람으로 변화된다. 말씀이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라.

측면과 배후를 대비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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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과 배후를 대비하라."(8.26.05)

계속된 승승장구를 원한다. 그런데 연속된 승리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첫째, 적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방심한 적을 치는 것과 준비된 적을 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대개 처음에는 얼떨결에 이긴다. 운동경기를 보면, 신인이 나와서 큰 활약을 한다. 그러나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왜? 집중 마크를 할 때도 그런 실력이 가능한가? "시간의 테스트"가 중요하다. 둘째, 승리에 취하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승리에 도취되면, 신중함이 결여된다. 승리의 핵심이 무엇인가?

1. 겸손함을 유지하라.
승리할수록 엎드려야 한다. 항상 첫싸움처럼 하라. "처음같이"하라. 잘나갈 때 조심하라. 마케팅 구호가 있다. "결코 리더처럼 행동하지 말라."  최고라고 생각하며 행동하지 말라. 낮추라.  과수원하는 사람은 "해걸이"라는 말을 한다. 한해 감나무에서 감이 많이 열리면, 그 다음에는 틀림없이 적게 열린다는 것이다.  까불지 말라는 말이다. 높은 자세일수록 넘어질 때 충격은 크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겸손은 그릇의 한계이다. 100만원에 교만하면, 100만원짜리이다. 1,000만원에 교만하면, 1,000만원짜리이다. 그 사람이 교만해 지는 지점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이다. 너무 작은 것에 교만해 지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겨우 그것에 교만해 지나? 수준을 높이라.

2. 배후와 측면을 조심하라.
  전투에서는 매복 전략이 중요하다. 왜? 배후와 측면을 공격하면, 쉽게 승리하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로마의 배후를 치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다. 배후를 치기 위해서이다. 칭기스칸은 배후를 치기 위해 500킬로의 키질쿰 사막을 횡단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은 쿠웨이트에 두 개 사단을 주둔시켰다. 그래서 이라크 주력을 여기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실제 공격은  아라비아 사막에 다른 군단이 했다. 배후 공격은 승리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공격할 때는 배후와 측면, 수비할 때는 배후와 측면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면 배후와 측면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앞만"보고 간다. 앞의 적만 생각한다. 앞의 과제, 이루어야할 목표만 생각한다. 측면이란 '주목하지 않는 현재'이다. 주목하지 않는 현실이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이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현실이다. 그래서 측면을 알기 위해서는 조언, 다른 사람의 통찰력, 특히 말씀의 시각이 중요하다.  배후는 확인했다고 생각하는 과거이다. 이 길은 막 지나온 길이다. 그래서 당연히 확인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없는 것이 많다.  삼손은 힘을 잃고도 깨닫지 못했다.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실증적으로 힘을 기르는 종이 되자.

관성의 힘으로 일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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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의 힘으로 일하라"(8.12.2005)

1. 일을 쉽게 하는 법 : 흐름을 이용해서 일하는 사람은 별로 힘들지 않게 일을 해 낸다. 관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뜨거울 때 하라. 사기가 올라 있을 때 하라. 움직임이 있을 때 하라. 관성을 이용하라.  달리는 기관차는 1미터 50센티의 콘크리트 벽을 뚫는다. 그러나 전시할 때는 2센티 벽에 전시한다. 어떤 사물이든 운동력이 있으면 강하다.  동기부여가 되면, 폭발력을 발휘한다. 도움닫기를 보라.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달려오는 탄력으로 뛰면, 멀리 뛸 수 있다. 테니스 칠 때, 자세를 낮춘다. 펴면서 나오는 관성으로 받고 공격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분야든지 지혜로운 사람은 관성의 법칙을 안다.

2. 은혜로 일하는 법을 배우라 :  율법은 고정된 힘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인생이다.  관성이 없다. 그러나 은혜는 관성이 있다. 자발성이 있다. 기쁨과 감격이 있다. 움직이는 운동의 힘이 있다.  히11장은 믿음의 관성을 알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관성을 아는 사람은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달린다. 관성이 생긴다. 그러니 힘이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운동량이 생겨서 관성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관성으로 일하면 쉽게 일을 한다. 신바람으로 일한다도 같은 뜻이다.  관성은 움직일수록 더 강해진다. 스스로를 먹이로 만든다. 눈덩이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땅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붙잡는다. 시간이 가면, 지치는 사람이 되지말라. 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열매가 많은 관성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라. 무슨 변화를 일으킬 때는 충분한 힘을 비축해서 "관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관성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선교, 동해선교, 일본선교, 대만선교, 미얀마 선교를 어떻게 다 감당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관성으로 하면 어렵지 않다. 여세를 몰아서 하면 어렵지 않다. 앞의 선교의 영적 힘으로 일하면, 힘들지 않다.

3. 관성을 막는 장애를 제거하라 : 왜 작은 모임일 때는 관성을 받기가 힘든가? 매우 작은 문제가 모든 사람의 초점을 흩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작은 것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한 두 사람의 관계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사역에 영향을 주고, 방향에 영향을 준다. 반대로  큰 모임에서는 작은 문제가 전체의 흐름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관성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답이 나온다. 작은규모라고 할지라도 초점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행동과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관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면 막아야 한다. 관성을 죽이는 영향력을 차단하고, 어떤 일이든지 관성을 가지고 일하는 지혜자가 되자.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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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갚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7.22.2005)

1. 받는 것을 다시 주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없는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시 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더 받은 것을 다시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7년간의 풍년을 주셨다. 그래서 곡식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 넘쳐나는 것을 나누라고 하신다. 넘쳐나는 것을 나누는 것이 뭐가 힘들겠는가? 형제들이 왔을 때, 그 넘쳐나는 곡식을 나눈 것이다.  또한 애굽의 총리라는 높은 권력을 주셨다. 그 권력으로 형제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은 힘든 일이 아니다. 더 받은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도의 자세이다.

2. 용서를 주라 :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많지만, 그 중에 용서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A.W. 헌터는 이렇게 말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방법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배신이다. 적어도 성도는 배신자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할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잘해준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수준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는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도가 살기를 원하신다. 결국 성도의 성장이란 바로 이 악을 선으로 갚는 삶, 용서를 주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하나님 닮은 모습은 용서하는 모습이다.

3. 용서가 살린다 :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는 결혼을 이렇게 정의했다. "결혼이란 용서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다." 가정이 회복의 능력을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정에는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자라나고, 부부가 서로를 세워주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매듭이 묶인 줄다리기와 같다.  서로 잡아 당기면, 매듭이 더 강하게 조여 들어서 풀 수 없다. 그러나 한 쪽이 놓으면, 풀릴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싸움을 끝낸다." 한쪽 줄을 놓아버리라. 용서하라. 그래서 각 곳에 쓸데없이 묶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푸는 종들이 되라.

거지 훈련시키면 거지된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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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훈련시키면 거지 된다."(7.11.2005)

1. 어떤 형제가 있었다. 형이 크게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멋진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다. 선물받은 동생은 동네에 있는 어떤 어린 아이에게 자기의 형이 자동차를 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어린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부러워요?" 자동차를 선물받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너도 장차 크면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을 날이 올거야." 그러자 그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선물받은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줄 수 있는 형님이 부러운거예요. 나도 커서 동생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 주는 형이 될거예요."
  사람들은 받는 것을 보며 부러워한다. 공짜로 얻는 것을 보며, 부러워한다. 주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면 부러워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주는 사람이 부러웠다. '나도 나중에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도 장학금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돕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주는 사람을 부러워하면 주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을 부러워하면 항상 받는 자가 된다.

2.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이 거지전도이다. 이것이 일종의 문화가 된 듯하다. 단기 선교를 떠난다고 하면, 모금을 하고 다닌다. 이렇게 남에게 얻은 돈으로 선교를 간다고 한다.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학생이 돈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구걸부터 배우는 것이다. '거지 훈련시키면, 거지가 된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 가운데 남 돕는 자리로 간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성장해서도 항상 남에게 손 벌리는 자리로만 가는 것을 봤다. 왜? 특기가 구걸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왜 돈이 없는가? 땀 흘려서 일하기만 하면, 아르바이트 자리는 널려 있다. 자립 정신을 심겨주어야 한다. 젊음이란 자산을 가진 사람은 받는 것이 아니라 도울 줄 아는 자로 가르쳐야 한다. '주는 훈련시키면, 주는 자가 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화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는 "주는 분"(giver)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고전4: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다.(약1:17) 하나님은 구하면 주시는 분이다.(마7:7)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선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4. 주는 훈련이 된 청년들은 자세가 달라진다. 태도가 밝아진다. 받기만 하는 사람들은 좀 덜 받으면 섭섭해한다. 기대했다가 받지 못하면 원망한다. 주는 사람이 제때에 주지 않으면 비판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비판적인 청년들은 항상 부자들이 왜 더 많이 베풀지 않느냐고 성토한다. 자기가 베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정죄 의식만 늘어난다. 반면에 주는 훈련이 된 청년들은 주면서 사랑을 배운다. 주면서 실제로 용서한다. 주는 행동 속에서 관용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깨닫는다. 주면서 성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이 인용한 유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너덜대는 악보를 바라보며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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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대는 악보를 바라보며..."(6.17.2005)

1. 작은 일에 철저 : 특새 찬양은 진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잘 준비된 찬양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말씀 전에 새 힘을 얻기도 하고, 새벽에 철저하게 준비된 찬양을 들으면서, 자신의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기도 한다. 그런데 목요일에 찬양을 한 진에는 진정 문제가 있었다. B4 용지로 복사된 악보를 왼쪽 귀퉁이에 한번 스태플러로 찍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중에 악보를 한 번 넘기면, 펼쳐진 책 두권을 넘기는 요란한 소리와 정신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노래 자체도 돌아가는 부분이 많아서 이리저리 악보 움직이는 소리에 찬양에는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2. 자기 중심적인 사고 : 왜 이런 제본을 하게 되었는가? 그 악보를 만든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한쪽 귀퉁이로 찍으면 자기 일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악보를 사용하는 사람, 그 찬양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3류는 자기 밖에 모른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항상 3류가 된다. 성장에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편하게 사용할까, 어떻게 하면, 보는 사람들이 편하게 볼 것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만 철저한 사람은 성장의 가능성이 없다.

3. 타산지석 : 금요일에 찬양한 진은 전날의 모습을 보고 보완한 모습이 역력하다. 제본도 잘 되었을 뿐 아니라 표지도 통일된 것으로 준비한 것을 보았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찬양의 수준은 둘째 문제이다. 먼저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서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성하는 모습의 출발이 될 것이다. 작은 일도 철저히 하자.
힘이 없으면 협상도 없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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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으면 협상도 없다."(6.10.2005)

1. 킹덤 오브 헤븐 : 영화가 거의 극장에서 내려올 때 쯤에 "킹덤 오브 헤븐"을 보았다. 십자군의 무모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물론 믿음을 가장한 잘못된 탐욕으로서의 십자군을 파악한 것은 옳은 일이다. 종교 지상주의적인 맹목을 공격한 것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잘못된 몇가지 근거를 토대로 더 잘못된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숨겨진 함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종교 다원주의 :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메시지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접근이다. 전쟁을 통해서 믿음을 강요하거나, 다른 종교인의 생명을 가치없는 일이라고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모든 종교의 가치를 다 인정하는 길만이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접근은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는 매우 호전적인 종교이고, 이슬람은 기독교의 호전성에 응전하는 선한 이미지로 그리는 것도 편견이란 생각을 갖는다. 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제작자는 극히 반 부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맹목적인 전쟁주의자를 조지 부시와 오버랩되도록 만들고, 그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오히려 화씨 911보다 더 조롱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옳음과 그름을 막 섞어 놓아 사람을 혼돈하게 만드는 시대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는 수순은 이렇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막 섞어 놓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거나 논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을 편가르게 해서 무조건 한쪽을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 두가지 메카니즘만 있으면, 신앙의 사람도 쉽게 변질되거나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들 수 있다. 속지 말아야 할 일이다. 정말 할 일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3. 힘없으면 협상도 없다 : 무모한 공격으로 십자군은 전멸되었다. 기독교도들은 남은 병력으로 예루살렘 성을 사수한다. 이슬람의 전면적인 공격을 목숨걸고 사수하는 이유가 있다. 사수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줘야만 생명을 보장받는 퇴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퇴각하기 위해서 사수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젊은이들은 그냥 협상이 좋은 것이고, 평화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순진한 생각은 없다. 힘없는 자와는 누구도 협상하지 않는다. 그냥 전멸시켜 버린다. 힘없이는 평화가 오지 않는다. 평화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힘의 중요성, 실력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왜 이 영화와 불멸의 이순신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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