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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3

종종 거절당하며 살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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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거절 당하며 살자”

요즘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을 많이 좋아한다. 창49:22의 말씀을 근거한 것이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엄밀히 말해서 요셉을 향한 야곱의 축복이다. 진짜 축복이 무엇인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서 담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케 한다.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다. 마지막에는 줄 것이 없는 밑둥만 남게 되었다. 나무는 노년이 된 그 소년에게 ‘내 밑둥에 앉아서 쉬어라’고 말한다. 노년이 된 소년은 잘려나간 밑둥만 남은 나무에 앉아 쉬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다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나무 같은 존재가 그립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는 삶, 그리고 언제나 찾아가도 그 자리에 있는 변함없는 삶이 그립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남을 돕는 것’이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왜? 자기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을 돕는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쓸모없음이라는 감정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어떤 분이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의지해서 걸어야 했다. 다치기 이전에는 몰랐는데, 시내에 왜 그렇게 계단이 많은지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높은 육교를 오르려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부축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찌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많은 사람이 도우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 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간 것이다.
  나는 아파트에 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같이 탈 때, 꼭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래서 같은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를 안다. 한번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있었다. 평소와 같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데 외면하면서, 치한을 대하는 표정을 지으면, 급히 계단을 향해서 뛰었다. 사실 좀 민망했다. 그 여자분은 아마 어떤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집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머리카락없고, 눈 작은 어떤 40대 남자가 나를 보고 웃고, 말을 걸더라. 그러면 그 집에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이상하게 보여도 그 사람은 목사이고, 항상 그렇게 인사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다시 그 여자분을 본다면, 그 다음에는 피하지는 않으면서, 인사를 받으리라고 확신한다. 주는 것이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낯선 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항상 호의적인 반응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거절 당하면 어떤가? 섬과 같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찬 마음을 웃음과 대화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중요한 성도의 사명이 아닐까?  야곱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좀 수모 당하고, 좀 거절 당해서라도 메마른 관계를 연결시킨다면, 그것이 축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자족의 능력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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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의 능력”

  요즘 날씨가 차다. 추위 속에 튀김을 파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추운데 힘드시죠?” “아니예요. 나는 이렇게 포장마차에서 일하지만, 찬바람 맞으며 하루종일 일해도 살기 어려운 사람이 많아요. 나는 감사하죠.” 찬바람 속에서 나오는 감사는 신선했다. 그는 만족을 알며 사는 사람이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본다. 누가 행복한가? 과도한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다. 욕심 버리며 사는 사람에게는 여러 유익이 있다.


  첫째, 욕심을 버리면, 결코 종이 되지 않는다. 항상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다. 내가 탐하지 않는 물건은 세상이 그 물건에 대해 아무리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할지라도 내게는 무용지물이다. 교회 안에서 바이올린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낡아 보이는 바이올린 가격을 물어봤다. 별로 비싸지 않다는데, 수천만원이라고 했다. 연주자의 소원은 더 좋은 바이올린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내게는 아무리 좋은 바이올린이라 할지라도 별로 갖고 싶은 마음이 없다. 끌리는 것도 없다. 왜? 내게는 바이올린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은 하는 명품 가방을 남자들이 보면, 아무런 감동이 없다. 왜? 그 가방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욕심만 죽이면, 어떤 유혹도 힘을 잃어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갖고 싶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미끼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탐욕스런 사람은 가장 약한 사람이다. 욕심이 없어야 장애가 없다. 시험이 없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커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은 사라져야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래야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욕심으로 망치지 말자.

  둘째, 욕심을 버리면, 많은 기회를 얻는다. 경제학 용어에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란 말이 있다. 기회비용이란 그걸 함으로 말미암아 하지 못해서 생긴 손해를 말한다. 집에 대한 욕심에 대한 예화가 기억난다. 집없는 사람이 열심히 돈 모아 집을 샀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이 불편해 더 돈을 벌어 집 안에 화장실 있는 집을 샀다. 딸들이 많아 화장실 하나로 불편해서 화장실 둘 있는 집을 샀다. 어느덧 나이는 60세를 넘어섰다. 이 사람이 평생 한 일은 화장실 바꾸는 일만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소했었다. 왜? 허망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집 하나를 얻기 위해서 수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포기한 것이다. 친구들과 교제가 가능하려면, 서로 밥도 사고, 선물도 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사람은 집 사기 위해서 이것도 포기했다. 종종 이웃에게 어려움 당할 때가 있다. 도울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했을 것이다. 왜? 집 사기 위해서... 직업은 자기 적성에 맞아야 한다. 그런데 돈 많이 버는 직종은 따로 있다. 많은 학생들이 의대나 법대로 가려고 한다. 적성과는 관계없이 돈 많이 벌기 때문에 이런데로 몰려든다. 왜? 돈 벌기 위해서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다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족은 중요하다. 그런데 가족들과도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왜? 집사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좋은 추억이다. 아빠와 함께 걸었던 고궁, 함께 식사한 기억들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왜? 집 사기 위해서..  살 집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너무 과도한 욕심이 문제라는 말이다. 욕심만 내려놓으면, 삶이 윤택해 진다. 잊혀졌던 너무나도 많은 기회들이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사랑의 힘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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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이타적이 된다. 사랑하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것과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퍼주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대가 웃으면, 자기도 웃는다. 상대가 울면, 자기도 운다. 상대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다. 상대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다. 자기를 잊고, 온전히 상대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사랑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비체험이다.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는 사랑인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사람의 행동의 방향이 바뀌는 예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회개이고, 둘째는 사랑이다. 회개하면, 바뀐다. 인생이 유턴한다. 그리고 사랑하면, 바뀐다. 자기 것을 잊고, 남을 위해서 살아간다. 고전13:4을 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자랑과 사랑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랑은 말 그대로 잘난척이다. 반면에 사랑은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내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돈이 없다. 그런데 내게는 돈이 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힘이 없다. 그런데 내게는 힘이 있다. 그래서 기쁜 것이다. 내가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양떼들을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비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전을 알고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비전도 사랑과 손을 잡아야 질주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가는 방향을 잡을 것이다. 사랑은 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영적 북극성이다.


  온전한 사랑은 사람을 성숙케 만든다. 사랑이 없을 때에는 오로지 “부분”에만 반응한다.(고전13:9) 그러나 온전한 사랑을 알게 되면, 전인격에 반응하게 된다.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자인가? 그 여자를 만나면, 빠지게 만드는 여자는 좋은 여자가 아니다. 꽃뱀이다. 좋은 여자란 그 여자를 만남으로 인해서 나를 자각하고,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만드는 여자이다. 좋은 남자는 누구인가? 그 남자를 만나서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비족이다. 그 남자를 만남으로 인해서 나를 자각하고, 내가 여자임을 자각케 만드는 남자가 좋은 남자이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걸.” 자주 부르는 찬양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과 만나면,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케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사람과 만남이 이루어지면, 성장하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거울이 된다. 자신의  가치와 장점과 가능성을 보는 거울이다. 그래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지닌 좋은 거울이었다.


수가성의 여인은 아침에 물가에도 나오지 못할 부끄러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는 좋은 점을 드러나게 하셨다. 여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전역에 좋은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창기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속에 헌신과 사랑의 가치를 드러내어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신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일반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위치였다. 그런데 그의 열정과 믿음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의 집에 들어가기를 청한다. 그리고 그의 회개의 고백을 듣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한다. 가치와 장점과 가능성을 드러내는 좋은 영적인 거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성장케 한다.

백부장의 믿음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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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

  사람들은 믿음의 모델을 찾는다. 마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그 믿음의 모델이다. 그의 믿음의 강점은 무엇인가?

  첫째, 문제를 가져오는 믿음이다.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해답을 가지고 와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만 가지고 오면 된다.그러므로 문제를 들고 나오는 사람이 최고의 문제해결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해결자를 제대로 찾아가야 한다. 질병은 의사에게, 재정은 재정전문가에게 가져가야 한다. 문제는 문제해결 전문가인 예수님께 가져가야 한다. 과거에는 know-how가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know-where가 중요해졌다. 답은 존재한다. 그 답을 찾기위해서 어디로 갈 것인지가 능력이 되었다. 문제를 가져도 못 가는가? 

  둘째, 남을 위해 몸부림치는 믿음이다. 자기가 잘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많이 보았다. 부자되려고, 출세하려고, 고시 붙으려고 뛰는 사람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밑의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몸부림 치는 사람은 보기가 쉽지 않다. 백부장은 하인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 주인은 하인의 아픔과 슬픔과 굶주림과 헐벗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 소아암 걸린 아이를 놓고, 몸부림 치는 여성을 보았다. 다른 사람의 골수 이식을 위해 발버둥치는 젊은이를 보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천국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꾸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추구하면 경쟁이 심하다. 그러나 낮은 곳으로 가면, 경쟁이 없다.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은 경쟁이 거의 없는 길이다. 그러나 그 희생의 길을 걸으면 영광이 임하게 된다.  사람의 만족이란 “경쟁할 때”가 아니라 “베풀어 줄 때” 최고의 만족을 느낀다. 남을 위해서 애써보았는가? 남을 위해 핏발이 서 보았는가?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다.

  셋째, 적극성을 지닌 믿음이다. 진짜 믿음은 결코 미지근하지 않다. 거지 바디매오가 구원받은 이유는? 적극성이다. 소리 질렀기 때문이다. 삭개오를 보라. 적극적으로 나무에 올라갔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 마리아를 보라. 향유를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붓는다. 머뭇거림이 없다. 진정한 믿음은 적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얌전하고 착한가요?”라고 하면 좋아한다. 그러나 서양어머니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안절부절한다. 왜? 그 말은 “진취성이 없어서 잘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태인 속담에  “내성적인 아이는 잘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몰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생명이다. 그래서 활발한 운동성을 가져다 준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은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은 신분으로 된다, 직분으로 된다고 하지 않았다. 믿음대로 된다고 했다. 안되는 이유는 믿음에 달려있다. 믿음을 가지라.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라. 큰 믿음을 가지라. 열매맺는 강력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려운 일도 쉽게하는 사람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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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도 쉽게 하는 사람”

  율법과 은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발성‘이다. 율법은 기쁨없이 억지로 일하게 만든다. 그러나 은혜는 기쁨으로 자원하는 자세로 일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받아야 변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은혜‘ 받으면 변화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범죄 후 고통을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  범죄하니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은혜가 사라지니, 자원하는 심령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나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같이 일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한 조직이나 교회로 만드는 비결은 노예근성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 기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기도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면, 때마다 ‘은혜의 파도’를 보내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 어려운 일도 쉽게 하는 비결은 이 은혜의 파도를 타는 것이다. 주신 은혜에 대해서 순간순간 순종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성령께서 성경을 읽고 싶은 충동을 주신다. 그때 성경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신다. 그때 즉시 기도하면, 기도의 영이 임하여서 어렵지 않게 깊이 있게 오랜 기도가 가능해진다. 나는 헌금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을 때, 즉시 헌금한다. 그러면 기쁨과 은혜 가운데 헌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은혜의 파도가 밀어 닥칠 때를 지나 굳어져 있을 때는 어떤 것도 쉽게 할 수 없다. 성경읽기도 힘들고, 기도도 힘들고, 헌금도 힘들다. 똑같은 일도 쉽게 하는 사람과 어렵게 하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은혜의 파도가 밀어 닥쳤을 때, 즉각 순종하는 것이다.  뜨거울 때 일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으면, 내면 속에 믿음이 자란다. 종종 믿음과 실천을 서로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사용하고자하는 욕구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자전거를 줘보라. 반드시 타보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펜을 주어보라. 반드시 써보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많이 한다. 그래서 기능성 옷들이 몇 개 있다. 방수, 방풍, 투습이 되는 옷이다. 보기에는 좋지 않지만, 험한 상황에서도 잘 견디어 낼 수 있다. 이런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치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일부러 험한 상황이 있는 곳을 가는 경우도 있다. 왜? 기능성 옷을 지니고 있으니까,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강한 믿음이 생기면, 사용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래서 고난에 참예(빌3:10)하는 길을 선택한다. 성도는 믿음을 지니고, 고난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존재이다. 왜? 그래야 믿음의 가치를 깨닫고 되고, 믿음이 빛나기 때문이다. 은혜 없으면, 큰소리는 치지만, 내면은 무너져 내리는 유약함이 있다. 그러나 은혜 안에 헤엄치는 성도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영적 광야에서 고난의 상활을 즐기면서 믿음의 능력을 만끽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아닌 은혜의 삶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일도 쉽게 하며, 고난을 즐기는 은혜의 승리자가 되자.

접근의 힘을 활용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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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의 힘을 활용하라.”

  어떤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 현미경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멀리 보기 위해서는 망원경, 작은 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 같은 기계를 사용하면 된다. 기술의 문제, 능력의 문제이다. 실력을 쌓고, 혁신을 이루면, 많이 볼 수 있고, 더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대개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잘 본다. 그래서 성공하거나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상 똑똑한 사람들이 잘 보는 것만은 아니다. 특별한 능력이 없더라도 잘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가까이 가서 보는 법이다. 아무리 기술이 없고, 기구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선 가까이 가면 잘 볼 수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접근의 힘이다. 더 잘 보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면 된다. 그러므로 지식은 발과 연결되어 있다. 항상 가까이 가면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주께로 가까이” 가면 된다. 가까이 가면 크게 보인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크게 보인다. 문제에 가까이 가면, 문제가 크게 보인다. 대화 중에 항상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문제가 많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문제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인데 항상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가까이 있으니, 하나님만 보이고, 하나님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리의 문제이다. 다윗은 광야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과 찬양은 온통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왜?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나아지라고 말씀했다고 하면 사실 쉬운 일이다.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신다. 이것은 거리의 문제이다. 가까이 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핑계댈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내가 영향받기를 원하는 곳에 가까이 가라. 당장 몇배의 강력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장의 비밀은 접근에 있다.
  첫째,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 할 수 있으면 새벽기도, 예배, 선교의 현장에 가까이 가라. 술집, 춤추는 곳, 백화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찾지 말라.  선교의 현장, 예배의 현장으로 가라. 거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둘째, 사람에게 가까이 가라. 가까이 가야 친해진다. 교제가 가능해 진다. 봉사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자매가 결혼 문제로 상담을 했다. 아무리 헌신해도 하나님이 형제를 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자매가 봉사하는 곳은 여자들만 있는 곳, 노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무슨 결혼 상대자가 있겠는가? 결혼 상대자가 있을 만한 곳에 가까이 가니, 곧 결혼의 길이 열렸다.
  셋째, 전공에 가까이 가라. 모르면 가까이 가서 보면 보인다. 과학을 하는 사람이 너무 언론이 가까이 하는 것을 보았다. 조금 우려했다. 나중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과학을 하는 사람은 실험과 연구를 가까이 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과 양떼를 가까이 해야 한다. 자기의 전공과 사명에 가까이 해야 성장이 있고, 열매가 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성공확률은 줄어든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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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많이 할수록 성공확률은 줄어든다."

  며칠전 한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배고픈 박사, 공장으로 가다" 가방끈이 길어서 취업이 되지 않는다는 기사였다. 초고학력 사회가 되어서,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성공확률은 줄어든다는 말이다.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던 부모들은 자식들이 공부를 통해서 신분 상승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상황은 공부를 통해서 더 나은 위치로 올라가는 시대가 아니다. 더 배우면 기회가 많아진다는 생각은 이미 20세기의 생각인 것이다.
  사실상의 20세기는 1980년에 시작되었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 법대 2학년을 중퇴한 때이다. 2년만 버티면, 졸업장을 얻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20세기 인간이다. 빌 게이츠에게는 2년도 긴 시간이었다. 반도체의 한 주기가 6개월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그 주기가 3개월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간 싸움, 현장 싸움이 21세기이다. 아이팟 돌풍의 주역인 애플의 스티븐 잡스도 리드 대학을 중퇴했다. 실제적인 공부는 현장과 청강으로 들은 펜글씨 강좌였다. 여기서 아름다운 서체와 맥킨토시의 그래픽 개념이 나온 것이다. 새로운 인사이트와 아이디어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다. 21세기는 카피(copy)의 시대가 아니다. 학교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창의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미술사를 보라. 미술의 대가는 학교에서 나오지 않았다. 기존의 화풍을 반대하고 나온 인상주의 운동, 빈센트 반 고호 같이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여는 사람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음악도 공부를 많이 하면, 남의 주법을 흉내내기에 급급한다. 그러나 진짜 이 시대가 찾는 음악은 자기의 감각으로, 자기의 느낌으로,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을 기대한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최상의 설교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원고에 매이지 않는 현장에서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원고와 현장의 성령이 도우심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최상의 설교는 현장의 거친 숨결, 표정, 격정, 더듬음, 실수 등을 통해서설교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설교에서도 자유로움이 생명이다. 나는 만 30세에 담임목사가 되었다.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창의적인데 도움이 되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른 사례를 찾기보다, 성경 속에서 원리를 찾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창의적인 접근을 하는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모르는 것이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식자우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만드셨다. 엡2:10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한다.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이다. 여기서 영어의 'poem'이 나왔다. 많은 번역은 'masterpiece'(걸작품)라고 표기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성과 개성을 발휘하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뜻이다. 82년 고등할교를 졸업할 때, 어머니가 내게 286 컴퓨터를 350만원에 사주었다. 당시로시는 매우 큰 돈이었다. 큰 인물되라고 하시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좋은 것이니, 10년은 써야 한다." 그 컴퓨터는 2년 지나고, 고물되었다. 상품은 시간이 지면, 페물되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의 김홍도의 그림, 안평대군의 글씨,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시간이 지나가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의식을 가져야 자유로움을 누린다. 작품의식을 가져야 자기의 인생을 살아간다. 창의력과 자유로움은 학교에서는 없다. 현장과 자기의 개성을 펼치는 장에서만 발견되는 보석이 창의력과 자유로움이다. copy는 힘이 없다. 교회는 성도를 original로 키워야 한다.

근육으로 일하는 사람 vs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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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으로 일하는 사람 vs.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

  우리의 삶의 질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생각에 의해서 더 많이 결정된다.  "생각이 가장 중요한데, 우리는 생각에 별 관심이 없다." 성장이란 생각의 중요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다. 병상에서도 "절대 안정"이라는 표식이 있곤 한다. 안정 없이 치유도 없다는 말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최근 외국의 한 잡지에서  "근육을 사용하던 한국, 이제 머리 쓰기 시작했다"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근육만을 사용해서 열심히 뛰기만 하던 한국이 이제는 더 이상 근육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생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중국은 월마트에 수출할 인형을 만들 동안에, 한국은 아이디어와 창의력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한국의 축복이다. 더 이상 원가를 절감하는 방법으로는 중국을 이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롭게 생각으로 승부를 거는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근육으로 일하는 사람은 결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복음은 생각을 다룬다. 복음은 생각을 변화시킨다. 복음은 생각을 강하게 한다. 새벽기도의 시간은 엄밀히 말해서 생각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생각하는 시간이다.그래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강하다.

  마귀는 생각을 공격한다. 생각의 질병을 심각하게 생각하라. 몸이 조금만 아프면, 난리를 부린다. 그런데 생각이 병든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몸에 대한 예민함을 생각에도 적용하라.  약한 생각에 빠지면, 말씀으로 무장하라.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서지 말라. 기도의 세례를 받지 않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구하라. 근육이 아닌 생각으로 일하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최상의 것은 기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서 일하라.

한달란트 컴플랙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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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란트 콤플렉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누구나 다 아는 달란트 비유가 있다.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해서 남겨야 한다는 것이 주 메시지이다. 그러나 동시에 놓쳐서는 안될 것이 '한 달란트 콤플렉스'이다. '한 달란트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첫째, 자신이 작다는 열등의식이다.  열등 의식은 비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옆사람은  5달란트, 2달란트를 받았는데, 왜 나만 1달란트냐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시기심, 좌절, 원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결국 부정적, 반항적이 된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실패자가 된다.  크기로 열등의식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작더라도 생명이 있으면 된다. 생명으로 접근하면, 크기는 문제되지 않는다. 큰 강에 미꾸라지와 나무 판자가 있다. 미꾸라지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나무판자는 그럴 수 없다. 왜? 생명이 있음과 생명이 없음 때문이다. 크기와 생명을 바꾸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전자제품을 사보면, 작더라도 기능이 좋은 것이 비싼 가격에 팔린다. 작은 성능이라면 크기가 클수록 가격이 떨어진다. 크기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는가? 나를 쓸 수 있는 힘있는 자의 눈에 띄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것만 보는 자는 큰 자가 아니다. 진정으로 큰 분이신 하나님은 작은 것을 보신다.  "나노의 세계"를 아는가?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은 작은 세계이다. 하나님은 영적 나노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신다. 다윗이 들판에서 양떼를 치는 작은 충성과 성실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신 것이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야 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다.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기는 모든 것이 다 주인 것이 되고, 실패하면 배상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생각이 이러니 행동이 굳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주인은 결코 굳은 사람이 아니었다. 종들에게 즐거움에 동참케 하고, 남긴 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후한 사람이었다. 게으름의 원인은 영적이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영적으로 악하면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요즘 몸이 느려졌는가?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 드리니"(찬348장)라는 찬송의 2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합소서" 헌신하는 마음이 민첩하게 하게 만든다. 빠르게 만든다. 부지런하게 하게 만든다. 바른 하나님에 대한 태도로 손과 발이 민첩해지는 변화를 맛보기를 바란다.

날개짓이 믿음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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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짓이 믿음이다."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광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독수리이다. 모세는 독수리의 새끼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어미 독수리의 사랑과 같다는 것이다. 독수리 어미는 새끼를 위해서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보금자리는 생명이 가능케 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 왜 그런가?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1-12)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통해 안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기 위한 어미 독수리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보금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우리의 성장과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한 것이다. 보금자리가 어지럽혀질 때,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두가지이다.
  첫째, 보금자리를 생각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생각하라. 잃은 것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초점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관심을 전화하라는 것이다. 좋은 보금자리는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더 높은 차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잃은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보금자리에서의 안주의 모습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 이후에 핍박이 왔다. 그래서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잃은 예루살렘만을 추억하지 않고, 있는 곳에서 더 큰 가치를 발견하고 복음 증거했다. 그래서 땅끝까지 복음 증거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어려움이 미래의 길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
  둘째, 최선을 다해 날개짓하라는 것이다. 보금자리에서 떨어질 때, 날개짓하는 것이 믿음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가만히 통닭같이 떨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어미 독수리의 목적은 새끼의 날개짓이다. 나는 것은 처음부터 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밑에서 받아준다. 그래도 날개짓하고 또 날개짓해야 한다. 떨어뜨리는 이유는 날개짓 자체가 목적이다. 어려움이 올 때, 최선을 다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날개짓하라. "그 과정이 목적이다." 떨어져도 날개짓은 헛수고가 아니다. 내 힘이 강화되거나,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주를 믿고 의지하라.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날개짓하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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