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허락하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한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 가운데
그다지 큰 도움을 주시지 않는 듯한 인상을 많이 주고 계십니다.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 많은 난관과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사역을 하도록
사도 바울을 방치하시는 것 같습니다. 도
무지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는 쨍하고 해 뜰 날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어려움의 연속이요, 고난과 고통의 때입니다.
그러면서도 더욱 놀랍고 의심스러운 것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엄청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멈추지 않게 했을까요?
물론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금까지도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 설명을 마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넘어갑니다.
성령 충만해서 그 어려운 사역을 다 감당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 때의 성령 충만과
오늘 우리들 때의 성령 충만의 양이나 질이 다르다는 겁니까?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가 보내신 성령도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집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이고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를 가고자 했던 이유는
로마가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들의 속담처럼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뜻에서
로마를 가고 싶어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로 “경영” 했다고 말씀을 합니다.
“경영” 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결정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바울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는 관계없이 로마를 가야 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산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는 그 기준이 뭡니까?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유혹의 욕심입니다.
그것도 썩어가고 있는 욕심입니다.
마치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지도 모른 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욕심을 따라서만 삽니다.
그것도 이 세상을 사는 것에 대한 욕심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잠시 잠간 지나가는 삶입니다.
여행하는 것입니다.
외출 나온 겁니다.
외박 나온 것이고 휴가를 나온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반드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두 곳이라는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두 곳 중에 하나만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 두 곳 모두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만 할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굳이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어느 곳으로 가서 살게 될지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정확하게 잡아야만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과 우리들의 삶의 차이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너무나 정확하고 확고부동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의 목표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도무지 다른 것에는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만이 자기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목표인 것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하나님만 붙들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때가 되면 채워지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붙들지 않고 지금 이 세상에서의 것을 붙들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로라는 이름이 대표 격으로 나옵니다.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는 은장색들과 직공들과 그것을 영업하는 자들입니다.
에베소의 아데미는 여자들의 다산을 상징하는 대지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아데미의 신전은 그 크기가 가로 120m, 세로 60m 니까 엄청나게 큰 겁니다.
다산의 신이니까 어떻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은 엄청난 겁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을 찾아와서 아이를 가지려고 정성을 들입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돌하루방의 코가 다 닳아서 납작해져 있는 것을 보셨죠?
돌하루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만지는 겁니다.
그런데 은장색들은 바로 이 아데미가 있는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팔면서 아이들을 갖게 된다는 별별 소문을 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너도나도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장사를 방해하는 훼방꾼들이 등장을 한 것입니다.
누가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은장색들의 훼방꾼이 됩니다.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금껏 우상을 섬겨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 과감하게 아데미를 던져 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자기들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26-27절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는 우상과 귀신들과 온갖 잡신들이 두려워 떠는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때문에 분명히 반대가 있습니다.
온갖 핑계를 다 다면서 맹렬하게 반대를 합니다.
복음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만 서게 하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단들이 그 권력을 쉽게 내려놓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생명력을 이 세상 가운데서 뿌리내리려고 합니다.
때문에 어찌하든지 믿는 자들의 시야를 가리고 차단하고 방해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려고 하는 사단이 동원하는 방법과 대상은 그 제한이 없습니다.
영역에도 한계가 없습니다.
무차별 공격입니다.
렘18:15-16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겔22:25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전재와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로 그 가운데 많게 하였으며”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까지 난무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이 뭡니까?
오늘 데메드리오를 통해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24-25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적지 않은 벌이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은감실을 만드는 업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 문제가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관심은 언제든지 먹고 사는 문제에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관대해지는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면
그것이 우상을 만드는 건지, 섬기는 건지에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이 먹여 살리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차라리 굶어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만 하는 건데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세상의 소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질 못합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많든지 적든지 전혀 관계없이 그냥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십자가만 붙들고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자랑이 되고 영광이 되고 은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날마다 믿음이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동요하지 않는 믿음의 자세로 서야만 합니다.
찬양만 그렇게 부를 것이 아니라 삶이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어야만 하는 겁니다.
빌 4:9-13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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