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언제든지 강력한 반대를 부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거저 가만히 받아들여지고
의의 없이, 항의 없이, 반대 없이, 도전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항상 반대와 도전과 조롱을 당해왔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 때부터 스데반을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는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왜 그렇게 슬픈 역사가 반복이 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어떤 것이 정말 사는 길인지를 모르니까 그럽니다.
제대로 사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정확하게 모르니까
지금 여기서 잠간 사는 것에 목을 매고
그것에만 온 관심을 다 쏟는 겁니다.
오늘 에베소의 은장색들이 중심이 되어서 일으킨 본문의 혼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섬기는-아니 솔직하게 표현을 하자면 먹고 사는 수단이 되어 있는-아데미 신전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해서 이렇듯 폭동의 수준에 이르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거의 본능적이고 필사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연극장에 끌고 간 무리들의 행동은
솔직히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선동을 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그 분명한 이유도 모르는 채 흥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흥분부터 하고 열부터 내고 폭력부터 휘두릅니다.
32절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왜 모였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소리 지르고 욕하고 싸우고 보는 겁니다.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함께 따라하고 보는 겁니다.
이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이렇습니다.
무조건 따라하고 보는 겁니다.
장례식장에 엉겁결에 따라와서 같이 울다가
나오면서 도대체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들어 인터넷에서 마녀사냥이 자주 벌어집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더라 하면 그냥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해버립니다.
아주 잔인하게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공격을 합니다.
자기와 별 관계없고 상관없는데도 다들 하니까 덩달아 자기도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갑니다.
남들이 거름지게 지고 장에 간다고 자기도 덩달아 가는 겁니다.
호 4:1-7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결국은 망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될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사는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범죄인 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복음 앞에 시위하는 것이 범죄인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죽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저들을 보면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분명한 확신과 영원한 목표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왜 이단들이 이미 구원받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묻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아닙니다.
구원이 확신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갑니다.
내가 가진 확신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
확신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때문에 진리에 대한 확신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분명한 지식입니다.
알아야만 하는 겁니다.
알면 됩니다.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자꾸만 변하는 겁니다.
좋을 때는 좋다가 나쁠 때는 나쁜 겁니다.
특히 자기의 위치나 현재의 상태, 마음에 따라서 자꾸 달라지는 것이 느낌이요, 감정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구원받은 것 같다가도,
또 어떤 때는 지옥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변함이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의지하는 겁니다.
나를 보고 나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신앙의 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논리는 오로지 하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습니다.
솔직히 나보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을 보면 허탈함만 느끼고 부족함만 느낍니다.
반대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는 교만함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들의 환경이나 형편, 처지는 나한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나를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허락해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려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과 집중력을 보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별로 필요치 않은 지식입니다.
그저 시험이나 치를 때 답으로 쓰는 지식입니다.
때문에 어느 하나가 반드시 정답일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가 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진리입니다.
때문에 전혀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스스로가 방해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살면서 기껏 이 세상의 것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살자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는 이 세상의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살아야만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저는 어제 참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로를 하는 데 1억 씩 내라고 하는데 몇 사람이 수석장로를 찾아가서
우리는 5천만 원에 장로를 세워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5천만 원으로는 절대 장로가 안 된다고 거절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장로를 세우는 기준도 이미 세상적이고,
장로가 되겠다는 생각도 이미 세상적인 겁니다.
한마디로 망하려고 작정한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교회가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미 진리에서 떠난 겁니다.
교회는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교회생활을 이만큼 했으니까 장로가 되어야겠다는 것도 이미 진리에서 떠난 겁니다.
진리는 사람의 눈치 보질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미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다 거부하는 겁니다.
빌 3:7-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큰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미 삶의 방향을 한 곳으로 정하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 길 중에 어떤 어려움과 아픔과 환난과 시련이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아니 진리인 지식이니까 결코 놓칠 수가 없는 겁니다.
진리의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게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더러 알아달라고 조르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몰라주는 것에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냥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아니 달려가지 못하더라도 걸어서는 가는 겁니다.
단번에 달리지 못하고 쉬엄쉬엄 가더라도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곧장 가는 겁니다.
오늘 서기장이 흥분한 무리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경솔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로 인해서 무리가 흩어지기는 했지만 이 말이 진리가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소리였을 뿐입니다.
소극적이고 인간적인 소리일 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달려가자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다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지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결국은 무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리를 따라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따라서 사시기 바랍니다.
무식하게 같이 죽어가지 마시고,
사람눈치 보지 말고 일어나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이기를 하니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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