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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믿음이 있다 하면 / 행20:1-6 (신222쪽)

가만 보면 사도 바울의 여정은 언제든지 사람들에게는 쫓기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가라고 지시하는 양 갈래 길에서 다니는 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몹시도 헷갈리는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헷갈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한 가지의 원칙 때문입니다.

 

그 원칙이 뭡니까?

명령하시는 일이라면 그 명령의 내용에 전혀 관계없이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부하거나 따져 묻거나 질문하거나 요령을 부리는 일이 없습니다.

한 가지 일에 오로지 한 가지 원칙만 적용하고 사는 겁니다.

그냥 그것에 순종하고 사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이 다니는 길만 해도 이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걸어 다니는 거리만 해도 이건 상당한 거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못한다고 하지 않고

꾀병도 부리지 않으면서 그냥 다 감당합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와 그 안의 제자들도 다 그렇습니다.

 

20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0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저 에베소의 난동이 그치니까

그냥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났겠거니.’ 라고 단순하게 생각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영적인 환경과 형편과 처지를 생각해서

비교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단순히 사도 바울이 며칠 있다가 떠났다는 그 이상의 은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담임목사입니다.

교회행정이나 정치적으로는 교회의 최고기관이 당회가 있다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담임목사의 절대적인 권한 하에 교회가 움직입니다.

때문에 담임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담임목사가 두부가 건강에 좋다는 설교-사실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만-를 했다고

동네 슈퍼의 두부가 동이 나버리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사의 권한이나 파워가 좋아 보이는 것 같지만

이것이 사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다들 장애인 성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이 해야만 할 모든 신앙생활을 몽땅 다 담임목사한테

떠넘기고-우리 담임목사님 최고야! 라는 말-

정작 자기들이 해야만 할 일들은 다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담임목사가 거의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적으로 정해 놓은 70세의 정년을 다하고도 더 하겠다고 난리입니다.

아니 더하고 있는 교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그런 풍토를 다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죠?

우리 목사님이 은혜롭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담임목사님이 설교 잘하고 은혜롭고 능력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해야만 할 성도의 사명을 몽땅 다 그 자랑에다가 떠넘겨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의 삶을 개판 오 분 전 아니, 개판 시작 365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자기네 목사님, 자기네 교회, 자기네 선교회 자랑하는 것으로

성도된 사명을 다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 목사님이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겁니다.

그렇게 붙잡아도 떠나야할 때는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잘난 줄 알고 여전히 엉덩이 디밀고 잘났다고 설교랍시고 하고 있는 겁니다.

개꼴입니다.

개꼬라지 입니다.

담임목사 1인 지상의 교회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 초대교회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모든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는데

이제는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떠나지 못하는 목사들과

자기 책임은 회피한 채 듣기 좋은 설교에 취해서 그 목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교인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그 어디에도 화합하거나 하나 되는 모습이 없습니다.

십자가 높이 세워서 사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나 사도 바울은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웬만한 믿음으로 박해와 핍박 중에 자기들의 담임목사격인 사도 바울을

다른 곳으로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떠나라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교회 놔두고 가면 누가 떠안고 갈까봐서 휴가도 제대로 못가는

새가슴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떠나고,

또 떠나는 사도 바울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붙들지 않습니다.

그것도 어디 떠나는 길이 꽃마차 타고 가는 길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가는 곳곳마다 사도 바울을 해하려고 노리는 무리들 밖에 없는데도

기꺼이 떠나고 기꺼이 보내줍니다.

 

이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담임목사가 없어도 돌아가는 교회,

담임목사의 능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사명을 확인하는 성도가 진짜 교회요, 성도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능력이나 성도의 열심을 통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실력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을 걸어 다녀야만 합니다.

그 길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권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있습니다.

아니 더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간다고 하면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길로 가려고 하니까 사망의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지키시는 교회라면 담임목사가 없어도 다 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목회를 하니까 갈수록 사람들의 소리와 생각에 마음이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신앙생활을 하니까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겁니다.

 

성도는 그냥 정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을 갈 뿐입니다.

교회는 그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 중에 하나가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강조점이 있는 겁니다.

믿음의 선택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게 자격이 없고 실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니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못 믿으니까

하나님까지도 실력이 없고 능력이 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어찌되든지 무슨 염려가 됩니까?

내가 자꾸 나서니까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다 됩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 열심으로 여기저기 다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다니는 겁니다.

때문에 다 맡기고 다닐 수 있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간섭하고 챙겨야할 교회가 몇 개나 됩니까?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교회가 다 든든하게 서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다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과 믿음 없는 성도들로 인해서 전부 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교회들을 다 다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가라하는 곳으로만 찾아다닙니다.

방해하는 세력들을 피해서 다닙니다.

결코 맞서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실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문제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라는 곳을 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언제든지 그것이 우선입니다.

때문에 교회들과 성도들 놔두고 먼 길을 떠나도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가 되는 곳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으로 믿고 다닙니다.

 

더군다나 그의 사역을 돕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의 남은 일들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실력-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까-을 가진 동역자들이

곳곳에 다 있고 같이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사역을 나눠서 감당합니다.

 

결코 그들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역자로 생각을 합니다.

생각과 뜻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만이 동역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서로를 세워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사역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신 은혜와 사명대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의 틀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고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 되는 겁니다.

 

4-5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보세요.

이들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각 자의 출신지가 다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삶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감을 입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다하면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엡 2:11-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지경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을 다니면서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고

우리 서로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가기만 하면 됩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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