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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행하시게 / 행19:8-20 (신220쪽)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놀라운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한 사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사도 바울이 왜 12사도 가운데

그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를 늘 의문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 볼 때 12 사도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성공적인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 바울이 성공적인 목회와 사역을 감당한다고 해서

그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많은 개종자와 회심자가 나왔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한 만큼의 더 많은 실패가 있었던 사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8-9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어떤 면에서는 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만 이 대목에서 걸리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 걸립니까?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걸립니다.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 바울은 복음의 도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떠나 갈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 구원하는 것을 이렇게 맘대로 내던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들의 어리석은 수고와 열심이 넘쳐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보세요.

한 영혼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

한 사람만 붙들고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자세가 제대로 서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확고부동한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들을만한 귀를 가진 자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듣지 않는 자들을 어리석게 고집하면서 끝까지 한 번 붙들어보겠다고 하질 않았습니다.

듣지 않는 사람이면 과감하게 내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가 하는 수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자기의 능력과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수고를 따라서 감당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정당한 수고를 해도 그것을 자기 실력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포기할 것은 빠르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은 더 빨리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닌 것을 된다고 믿고 붙들고 씨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전하는 수고 그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더 많은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수고가 옥토에 뿌려진 씨앗이 되어서 열매가 맺게 되었습니다.

 

10절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서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는 수고를 그렇게 하니까 주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하는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감당하게 하는 수고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수고입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더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11-12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런데 이런 기적들을 왜 행하게 하실까요?

사실 오늘날도 이런 기적들을 행한다는 사람도 많고,

또 아직도 이런 기적들이 행해지는 곳도 있습니다.

 

때문에 기적 자체에 대한 그 어떤 논의나 궁금증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흔히 하는 이야기로 “체험하지 못했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때문에 이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되고,

못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 잘 못 믿는 엉터리 신앙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까?

이런 걸 못하니까 우리는 예수 잘 못 믿는 사람이라니까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는 그냥 웃어버리고 마시기 바랍니다.

 

왜죠?

이런 기적 자체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가적이 과연 어떤 목적인지를 제대로 알면 된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이걸로 사도 바울을 높이고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이면 그건 바로 엉터리 기복신앙입니다.

이건 사도 바울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전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자신의 질병도 제대로 못 고치고 있는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가시를 평생토록 안고 살았던 바울입니다.

그의 질병, 곧 가시는 그가 기도해도 전혀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가 지닌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몸에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도 떠나갑니다.

자기의 질병은 손도 못 대는데 남의 질병은 놀라운 방법으로 다 고쳐버립니다.

 

이게 뭡니까?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울 안에 머물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떤 실력과 능력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사도 바울을 들어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붙들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만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전하고 있는,

자기를 붙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신앙적인 태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겁니다.

때문에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더라도 결코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취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형편과 처지가 더 어렵게 되더라도

그것을 더 영광스럽게 여기고 기뻐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쓰임이 된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약한 것으로 인해서 결코 실망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꼬드기는 마귀는 어떻습니까?

그냥 예수의 이름이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버린 신앙생활을 강요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냥 주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우리에게 행하신 것은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의 이름이 주는 기적만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잘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힘들게 예수를 믿느냐면서 오로지 자기 잘 되는 것에만 목숨을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날마다 즐겁고 행복한 장날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운 일,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이제는 갈등하게 되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신앙생활의 고민과 염려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어떨 때는 예수 믿는 것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믿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제 예수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 이름이 주는 기적만 따내는 삶이 아니라

내 온 몸으로 예수 믿는 믿음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나타내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신앙인이 되어 가는 겁니다.

 

골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되어서 점점 더 영적으로 나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 잘 사는 것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되는 겁니다.

 

오늘의 형편과 처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행하게 하시는 일이 되어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행하게 하시는 삶이니까 기도도 합니다.

말씀을 보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삽니다.

오늘은 비록 앞이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증인된 삶을 사는 겁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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