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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살아난 유두고 / 행20:7-126 (신222쪽)

오늘은 특히 졸지 말고 잘 들으셔야만 합니다.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에 대한 목사님들의 해석이 참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섬겼던 평촌교회 고준규 목사님은 조는 사람은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특별히 교역자들이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은 정말 불쾌하게 생각하셔서 엄청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은 두 가지 이유랍니다.

첫째는 본인의 영성이 바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조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성령이 거식증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마냥 조는 거랍니다.

또 하나는 담임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듣지 않으려고 하니까 졸음이 마귀처럼 찾아온다는 겁니다.

 

또 다른 분들은 설교시간에 조는 건 설교하는 목사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설교를 설교답게 하지 않고 강연처럼 하니까 존다는 겁니다.

목사가 졸립도록 만드니까 존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사실 오늘 본문은 이미 그 핵심과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졸면 죽는다는 겁니다.

물론 설교시간에 조는 것은 보기도 안 좋고 은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설교시간 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경을 써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설교 시간에 졸면 안 된다는 것만으로 결론을 내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현상들이 나타날까요?

 

옛날에 어떤 신하가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느냐고 임금에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임금이 신하의 머리에 접시 하나 올려주고서 궁궐을 한 바퀴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단, 머리에 인 접시가 떨어져서 깨지면 네 목을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신하가 궁궐을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온 몸이 땀에 젖었고 마음까지도 힘들어서 임금 앞에 와서는 푹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때 임금이 물었습니다.

“그래, 궁궐 안에 무엇 무엇이 보이더냐?”

신하가 대답합니다.

 “머리에 인 접시에 신경을 쓰느라고 궁궐 구경은 하나도 못했습니다.”

임금이 말을 합니다.

“그래, 매사에 그렇게 죽을 각오를 하고 일을 하면 성공한다.”고 했답니다.

 

물론 설교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집중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하는 목사도 더욱 열심히 준비해서 성도들이 졸지 않도록 해줘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설교시간에 죽는 성도들이 늘어나서

결국 설교를 듣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뭡니까?

솔직히 설교 시간에 참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자칫 몸이라도 피곤해서 잠간 졸기라도 할라치면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감기약이라도 먹고 예배에 나오면 얼마나 졸립습니까?

요즘 제가 감기약 며칠 지어먹었는데 밥만 먹으면 졸음이 쏟아집니다.

그러니 그런 몸으로 설교시간에 나오게 됩니까?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데 그 설교 듣다가 죽는다면,

아니 죽을 가능성이 있다면 누가 설교시간에 나오겠습니까?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나는 설교를 듣다가 죽어도 좋다고 나올 만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설교를 듣다가 졸면 죽는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심신이 피곤할 때는 설교시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바로 여기에 본문의 핵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졸다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우리 죽은 영혼과 몸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으라고 내던져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설령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해서 불미스러운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우리끼리 떠들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떠들었을까요?

 

한 번 짐작해보세요.

성경에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다들 이랬을 겁니다.

 ‘거봐, 왜 말씀을 듣는데 졸아?,

아니 그렇게 졸리면 방 안 쪽으로 앉아있지,

왜 창문에 걸터앉고 그래?’

 

다들 자기들 편한 대로 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편한 말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의 말 때문에 죽어가는 것도 한심한 일입니다.

왜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씁니까?

남들에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반대로 남들에게 대해서 자세히 모르면서 할 말 안할 말 마구 해대서

사랑해야만 할 이웃을 죽이지도 말아야만 합니다.

 

11-12절 “올라가 떡을 떼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교회가 해야만 할 일이 이런 겁니다.

서로 살아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각 자에게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에 대해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해서,

살려주신 감격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고 축하하고 사는 겁니다.

 

혹시라도 입을 삐쭉거리는 일들이 없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영혼을 살리고 소생시키고

새롭게 하는 생명의 공동체로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죽지도 않아야 하지만 남을 죽이는 범죄도 없어야만 합니다.

죄 많은 우리를 무조건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를 서로 나누고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겁니다.

 

사실 유두고가 졸고 있을 때부터 누군가는 깨워줬어야만 하는 겁니다.

아니면 기꺼이 자리를 바꿔줬어야만 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유두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누군가는 우리를 인해서 살아나야만 정상입니다.

나무목교회를 통해서 영혼이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합니까?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직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해야만 합니다.

 

설교시간에 피곤해서 졸던 유두고는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살아나야만 할 유두고는 누구입니까?

서로 깨워주고 자리를 바꿔주고 챙겨주고 안아줘야만 할 영혼들이 생각나십니까?

기꺼이 그 책임을 다하는 나무목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후 5:16-19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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