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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행한 일 (행14:8-18)

 사도 바울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되는 본문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고니온으로 도망을 하고,

또 이고니온에서도 역시 복음을 전하다가 루스드라로 도망을 한 바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곳에서 나면서부터 장애인이 되어서 일어서지를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나 고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은 마치 행 3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고쳐준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의 경우와 아주 흡사합니다.

나면서부터 장애인이라고 하는 것과

그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서서 뛰어 걷는 것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스스로 가둬버린 내 안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장애인은 자신의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설만한

믿음의 태도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이 장애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도 분명히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지만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동동 곱뿌가 없으면 못 마셔!

아시죠?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그 은혜를 받을만한 믿음의 그릇을 예비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들 몫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믿음과 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아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뭘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 하실지를 아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장애인의 경우를 들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9절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먼저 그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7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장애인은 바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복음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복음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온통 다 자기들 듣기 좋은 소리만 해달라고 하고,

또 듣기 좋은 소리만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안 듣고, 맨날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해달라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끔 사범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학생들이 교생 실습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처음 교단에 나오는 거라서

정말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가겠다고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딴 소리를 하질 않습니다.

 

기존 선생님들은 걸핏하면 자습이라고 하고,

딴 소리만 하다가 나가시는데 교생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학생들에게 뭔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가르침을 받아야만 할 학생들이 문제입니다.

교생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그냥 장난으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늘 주문하는 것이

미팅한 이야기,

여자친구, 남자 친구 이야기 등등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이야기 언제 다 경험합니까?

고등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가면 자기들도 다 경험하게 됩니다.

엉뚱한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오히려 진지하게 하나라도 더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지금 신앙생활 하는 모습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하면 말이 안 될까요?

그냥 지금 이 땅에서 잠시 사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행복만을 원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분 좋게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기분 좋으면 자기가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이라는 겁니다.

내 비위를 잘 맞추면

헌금도 더하고,

예배도 더 잘나오고,

전도도 열심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고,

성도들이 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놔두는 것이 좋은 목회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지금 복음이 전해지질 않습니다.

복음이 뭡니까?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임하게 되는 전제 조건이 뭡니까?

 

왜 우리가 구원을 굳이 받아야만 하느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이 전제가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져야만 하는 근거요,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굳이 복음을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또 복음을 전해도 듣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갈수록 설교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영적권위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만 하는데

갈수록 합력해서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망해가고 있는데도

망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죠?

여전히 사람은 모이니까 그렇습니다.

기준이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니까

자기가 가고 있는 신앙의 길이 제대로 된 길이라는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보세요.

오늘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장애인의 일어서게 되는 것을 보고,

다들 바울과 바나바를 추켜세웁니다.

그들의 믿는 신으로 인정을 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무리라고 합니다.


11-12절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의 방언으로 소릴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쓰스는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혹은 쥬피터라고도 하는 신입니다.

허메는 허르메스라고도 하는 머큐리우스, 즉 웅변가의 신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이 높여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바울과 바나바에게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받고도 남습니다.

바울이 행한 일은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걷지도 못한 장애인을

단 번에 일으켜 세우고 뛰어 걷게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루스드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장애인을 봐 왔습니다.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아니 일어날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번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울 때 베드로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예수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일으켜 세울만한 실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알고 있었던 것은 뭡니까?

이 장애인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기적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을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15절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한마디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상이 뭡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자기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질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야만 살 수 있는 삶인데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아니면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의 울타리 안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쌓고 사는 겁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하니까

그 안에 갇혀서 폼을 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굉장해 보이지만

사실은 움츠리고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 자신만의 생각과 사람들의 환호 속에 파묻혀서

자기 잘난 맛으로만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는 악한 삶을 사는 겁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혹시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바울의 행한 일을 기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의 행한 일이 기적이 되고 있으니까

아직도 우리들의 신앙수준이 기복신앙이라고 부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행한 일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장애를 고친 이 장애인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복음은 그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습니다.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있고 없고의 문제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대로 사느냐 못사느냐의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은혜대로 살려고 하는 거룩한 노력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혜는 결코 차별이 없는데

받아들이는 나는 내가 잘나 된 것 같고,

내가 뭔가 잘 해서 된 것 같으니까

내가 기준이 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기준이 될 때 내가 곧 우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준이 자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일 뿐이었고, 오로지 기준은 복음에 있었습니다.

자기의 행한 일들이 모두 복음 안에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는 낮아져도 되고 대접을 전혀 못 받아도 되는 겁니다.


빌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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